"우리나라에서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적으로 여기고 '한남' 같은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페미니스트의 기본적인, 가장 최소한의 자질은 성차별뿐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차별에 대해 높은 감수성을 가지는 겁니다. 그렇기에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보다 '내가 페미니스트라 할 자격이 있을까?' 되묻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출발점이에요."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마주한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페미니즘에 대해 내놓은, 곤혹스러움 가운데서 나온 격정적 설명이다.
인터뷰할 즈음에 마침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 안산 선수에 대한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산 선수의 쇼트 컷이, 다음엔 몸 담고 있는 출신 대학이, 이어 특정 단어 사용이, 그런 식으로 줄줄이 '이게 바로 페미니스트라는 증거'라는 소란이 일었다.
정 장관의 곤혹스러움은 단지 그가 여성문제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 장관이어서만은 아니다. '국내 여성학 박사 1호'로 40여 년간 여성학계에 몸담아온 사람으로서 최근 젠더전쟁 양상이 너무나 당황스러운 수준이어서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나 여성혐오는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예요. 그런데 요즘은 페미니즘이란 말 자체를 꺼낼 수 없고,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 말해야 하고, 페미니스트라는 걸 커밍아웃하듯 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당황스럽죠. 이번 안산 선수를 둘러싼 공방을 보더니, BBC 기자가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더러운 말(Dirty Word)이 됐다'고 하더군요. 살면서 우리나라가 이런 평가까지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우리 역사에 비춰 봐도 그렇다. '3·8 세계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 뉴욕에서 참정권을 요구하며 벌인 여성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념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그보다 10년 앞선 1898년에 이미 북촌 양반여성 300여 명이 여성참정권 등을 주장한 여권통문(女權通文)이 있었다.
그런 역사적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졌다. 정 장관은 인터뷰 내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말을 반복했다. "삶의 현장에선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 어렵고, 불법촬영물 불안에 떨고,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매 맞는 일이 벌어지지 않느냐"며 "그 대상에 여성이 많은 것이지 모든 인권침해와 폭력에 반대하며,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피해자에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최근 젠더전쟁의 키워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공정'이다. 서로 다른 성(性)을 향해 불공정하다는 공격이 끊이지 않는다. 정 장관은 "이 시대 '공정'에 대한 화두가 '개인의 성공'이란 좁은 시각에 매몰돼선 안 된다"며 "경쟁이나 기회에서 배제와 차별을 보완하려는 시각 없이 남과 여가 갈라져 분노의 표적을 만들어내는 건 올바른 해결방식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여가부의 존재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다음은 정 장관과의 일문일답.
-여가부 장관이기도 하지만, 여성학 1세대 연구자이기도 하다. 무엇이 바뀌었나.
"1997년 박사학위 논문을 쓸 당시엔 오로지 회사를 위해 살고 집에선 잠만 자는, 그런 사람이 이상적 노동자라 할 때였다. 이 남성 중심적인 조직과 돌봄을 해야 하는 여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는지 논문을 썼다. 조직에서 성별 분리가 나타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렵고, 그런 와중에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고민했던 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그때 얘기했던 문제들과 지금 현실이 그렇게 많이 바뀌진 않았다."
-청년층에서 '공정'이 화두다. 여가부가 추구하는 공정은 무엇인가.
"청년들의 박탈감은 이해하지만 공정은 다양한 측면을 봐야 한다. 달리기 시합에 비유하자면 마음 편히, 실력껏 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참가 자체를 못한 사람도 있고,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뛰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공과로만 평가하니 그 뒤엔 우울과 최장시간 근로, 세계 최저의 저출산 현상 같은 게 나타난다. 바람직하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사회다. 여가부는 성차별을 비롯, 경쟁에서 배제된 사람도 포용하는 공정을 지향한다."
-일부 남성들은 성차별적 정책이 불공정하다고 한다.
"저도 아이들이 있다. 일자리 구하기 힘들고, 열심히 벌어도 전셋값 감당이 안 된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정년이 보장되고, 월세에서 전세나 자가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게 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나. 문제의 원인을 봐야지, 젠더를 '분노의 방패막이'로 삼아선 안 된다. 남녀가 함께 고민할 문제이지 극단적 대결이나 혐오는 해결 방식이 아니다."
-극단적 혐오의 대표적 양상이 최근 안산 선수가 겪은 일이다.
"외신 기자가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더러운 단어(a dirty word)가 됐다고 하더라.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런 얘기까지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페미니즘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공존을 가로막는 가치, 제도다. 페미니스트여서 공격 대상이 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더러운 말이 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거다."
-여성혐오나 공격에 여가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얼마나 나서야 적극적인지, 그게 참 어렵다. 전국의 모든 일을 조사하고 개입할 수는 없지 않나. 여성긴급전화 1366이나 경찰 등 우리 전달체계가 있고, 체계가 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분명한 건 남성을 향하든 여성을 향하든 모든 혐오, 폭력, 인권침해적 행위에 반대한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태 당시 정부 여당의 반응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키운 측면도 있다.
"잘못에 대한 지적은 받아들여야 한다. 여가부에 대한 비판이 다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게 아니다. 피해자 중심의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로서 여가부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여가부 없이 각 부처가 여성 이슈를 다루면 된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을 보면 30대에 줄었다 다시 늘어나는 M자형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유이(唯二)한데 우리가 더 심각하다. 고용시장에서 중간에 한 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면 일자리 질이 뚝 떨어진다. 거기다 6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높다. 그 나이에 나가서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다. 젠더관점에서 분석과 개입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법무부와 경찰이 가해자 처벌에 중점을 둔다면, 우리는 피해자의 사회 복귀에 노력한다. 교육부가 학교 안 청소년만 다룬다면, 우린 울타리 밖 청소년을 다룬다. 성인지적 관점에서 평등하고 균형적인 정책이, 부처를 넘어 이뤄질 수 있도록 견인하고 추동하는 부처가 여가부다."
-그럼에도 존재감 부족이란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역할 재정의가 필요하지 않나.
"기대는 높아지지만 업무를 수행할 조직과 인력 부분은 약하다. 아무래도 좀 더 실질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아직 고용, 돌봄, 폭력 등 다뤄야 할 문제가 많다. 정책을 늘리는 것보다 피해자 관점에서 대응하고 배제된 집단을 포용하는, 본연의 자세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