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조심하겠다."
대권 행보 이후 유독 잦은 설화(舌禍)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여의도 신입생'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일 '말실수'를 줄이도록 주의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해명을 좀 더 들어볼까요.
"검사 시절에는 재판부와 조직 수뇌부, 같은 팀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직업이었고 정치는 조금 다른데, 제가 아마 설명을 자세하게 예시를 들어 하다 보니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더 친절하게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말하다 보니 생긴 '오해'라는 건데요.
어디서 많이 들었던 반응입니다. 2017년 대권 도전에 나섰다 하차한 반기문 전 유엔총장 역시 연이은 사소한 말실수로 공격을 받자 "오해"라고 해명하며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항변했죠.
돌이켜보면 반 전 총장의 논란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편의점에서 굳이 국산 생수를 두고 '에비앙 생수'를 집으려 했다거나, 지하철표 판매기에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넣으려 했다거나, 현충원 방명록 작성 과정에서 미리 적어 온 내용을 '커닝'한 것 등등.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이 익숙하지 않고 정치가 낯설어서 벌어진 실수라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았죠.
하지만 윤 전 총장의 말실수는 반 전 총장의 '애교'와는 결이 다릅니다.
논란이 된 발언은 인터뷰나 간담회 자리에서, 즉 준비된 답변으로 정책을 설명하며 나온 '실언'이란 점에서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려 하는 대선주자의 발언들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향후 국정 운영의 단초가 될 수 있으니까요.
비판은 거셌습니다.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은 기업가의 시각에 치우친 구시대적 노동관이란 우려가, "부정식품 선택의 자유" 발언은 국민의 건강권을 외면한 기득권 계급주의란 지적이, "건강한 페미니즘" 발언에 대해선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반박이 뒤따랐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없었다"는 팩트 자체를 왜곡한 발언에 대해선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고개를 저었죠.
윤 전 총장은 그때마다 "게임 개발 현장의 목소리"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에서 따온 것" 등 전해 들은 얘기를 인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는데요. 해명을 두고도 말이 많았죠. 타인의 얘기를 본인 내공으로 소화시키지 못할 만큼 정책적으로 준비가 덜 됐다는 걸 '셀프 인증'한 것이란 뼈아픈 지적이었습니다.
정치인의 말은, 단순히 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의 궤적과 소신, 추구하려는 철학과 비전 그 자체이기에 그렇죠. 또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청사진도 녹아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정치인의 말은,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인 거죠. 이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외면받고 뒤처질 수밖에 없겠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한 방에 훅 갔던 정치인들의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정치인들의 망언 모음집, 한번 살펴볼까요.
정치인의 역대급 '실언' 사례로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 거론되는 건,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터진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입니다.
당시 선거 판세는 열린우리당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죠.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차떼기'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후폭풍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에 시달리던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정 의장의 '말폭탄'으로 선거는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유권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던 한 일간지 인턴 대학생 기자의 평범한 질문에 정 의장은 "촛불집회의 중심에 젊은이들이 있다. 이제는 20~30대의 무대"라며 젊은 층의 투표 독려를 합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데 갑자기 노인들을 겨냥합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분(60대, 70대)들이 꼭 미래를 결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이제 집에서 쉬셔도 되고…"
노년층의 투표권 행사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상식을 넘어서는 발언이었죠. 정치적으로 어떤 실익도 없고요.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발언이 알려지면서 열린우리당 당사에는 노인들의 항의 전화가 쇄도하고, 관련 단체들의 항의 시위가 잇따랐죠. 야당은 "나라경제를 세우고 희생해 온 60, 70대에 대한 모독이자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라며 거세게 몰아붙였죠. 발칵 뒤집힌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렸다'고 원성이 자자했죠.
전남 지역 유세를 돌던 정 의장은 곧바로 "제가 말실수를 했다"며 전남 장흥의 노인정 두 곳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지만, 역부족이었죠. 결국 서울로 올라와 당사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엽니다.
"올해 83세인 노모가 새벽에 집을 나설 때마다 조심하라고 당부하는데 제대로 못 지킨 것 같다"고 거듭 사과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죠.
싸늘해진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정 의원은 결국 선거를 불과 3일 앞두고 선거대책위원장과 따 놓은 당상이었던 순번 22번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직을 사퇴하는 초강수를 둡니다. 선거 당일까지 시한부 단식도 벌였죠.
총선 결과는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 이상을 차지하며 승리로 돌아갔지만, 원래 기대했던 성적에는 못 미쳤죠. 정 의장이 감내한 정치적 타격도 상당했습니다. 정 의장은 200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노인 폄하 발언에 대해 "제 자신의 멍에라고 생각한다"고 토로했지만 늦은 후회였죠.
대한민국 정치인들 망언 중에 단골 소재로 꼽히는 건 '지역'입니다.
특정 지역을 치켜세우거나, 특정 지역을 비하하거나. 고질적 망국병인 지역 감정을 부추기며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이해 빠른 계산일 텐데요. 그러나 얕은 수는 늘 화를 부르게 마련이죠. 당장 윤석열 전 총장 역시 '대구 민란' 발언으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죠.
한국 정치가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시대'였던 옛 시절엔 이 '의도된' 설화가 먹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대표하는 그 한마디, "우리가 남이가"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 기억하시나요?
1992년 12월 대선을 코앞에 두고 부산에 내려온 김기춘 전 법무 장관과 부산 지역 주요 기관장들이 한데 모여 "믿을 건 부산 경남 뭉치는 것밖에 없다"고 '영남 만세'를 외쳤던 그 만남 말입니다.
정주영 당시 대선 후보가 이끌던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폭로로 발각됐는데요. 정권 차원의 선거 개입보다 불법 도청이 더 문제가 되면서, 결국 대권의 주인은 영남권에서 지지율이 급등한 김영삼 후보에게 돌아갔죠.
충청권 맹주였던 김종필 전 총리는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도가 핫바지냐"라는 구호를 들고 나와 충청도를 자민련이 휩쓸기도 했죠. "경상도와 전라도가 다 해먹으면 우리는 뭐냐"는 피해 의식을 파고들면서 지역 감정을 자극했던 결과였습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 불거진 이재명 경기지사의 '백제 발언'을 둘러싸고 "호남불가론 아니냐"고 반박한 이낙연 전 대표의 입씨름 역시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노림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여론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지역주의, 지역감정 자체가 소구력이 떨어진 정치 도구가 된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지역주의를 잘못 건드렸다간 바로 퇴출되기도 합니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일주일도 채 안 남기고, 자유한국당 대변인이었던 정태옥 의원 사례가 그러하죠. 당시 정 의원은 한 방송에 나와 "서울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혼을 한 번 하거나 하면 부천에 가고, 부천에 갔다가 살기 어려워지면 인천 중구나 남구 이런 쪽으로 간다"는 황당무계한 발언을 하면서 지역 비하 논란에 휩싸였죠. 네티즌들은 '이부망천'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 비판에 나섰죠.
인천과 경기 부천의 경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지적하려는 의도였다지만, 여야 할 것 없이 거센 비난을 했죠. 같은 당이었던 유정복 인천시장 후보는 "이미 국민의 대표로서 자격을 상실한 만큼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떠나길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요.
결국 정 의원은 탈당으로 속죄했고,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에 복당했지만 끝내 공천을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정치인들의 망언에 더욱 분개하는 건, 그 말의 칼끝이 주로 사회적 약자를 겨누고 있어서입니다.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할 정치인들이 도리어 편견과 차별을 퍼뜨리고 있는 상황인 거죠.
특히 영향력 있는 여야 대표들의 '망언'이 잦았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정치권의 인권 감수성 수준을 짐작하게 되죠.
먼저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입니다. '길거리 인터뷰는 하지 않는다'며 기자들의 질의응답도 마다하며 입단속에 나섰던 이해찬 대표는 지난해 1월 대형사고를 칩니다. 민주당 유튜브 채널에서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고 말해 장애인 비하 논란에 휩싸인 거죠.
사실 이 대표의 장애인 비하 발언은 처음이 아닙니다. 2018년 12월 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선 "정치권을 보면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들이 많이 있다"는 문제 발언도 쏟아냈죠. 당시 이쯤 되면 실수라고 보기 어렵지 않느냐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보수당도 만만치 않습니다. 2015년 12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당 청년위원회가 주최한 연탄배달 봉사 활동에 나섰다가 동행한 흑인 유학생을 두고 "니는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네"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내뱉죠.
비판이 거세지자 김 대표는 행사 종료 후 "현장에서 친근함을 표현한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발언"이라며 "상대의 입장을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고 사과했습니다.
김 대표는 중국동포(조선족) 비하 발언도 남겼는데요. 2016년 1월 새누리당 저출산대책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터키 이민자 유치 사례를 거론하며 "우리나라 이민정책으로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조선족이 무슨 출산 기계냐"는 비판에 직면했죠.
이밖에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도 수두룩했죠. 대표적으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2010년 "룸(살롱)에 가면 오히려 자연산을 찾더라"는 여성 비하 및 성희롱 발언으로 대국민 사과를 했었죠. 2017년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에 나선 급식 종사원들을 두고 "밥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왜 정규직화가 돼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거센 역풍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쭉 모아 놓으니, 스트레스 지수가 급상승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국민들의 정신 건강을 소중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선 주자들 스스로 더 각성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오해"라는 변명은 통할 수 없고, 통해서도 안되니까요. 대선주자의 망언이 거듭된다면, 그건 실수도, 오해도 아닌 신념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