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스마트팀TV개발팀 수석 김영수(최덕문)는 주차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사팀장이 그에게 희망퇴직 신청서를 내민 뒤였다. 구조조정 잔류대상 명단에 분명 김영수란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동명이인이었다. "여보, 현진이 등록금 걱정하지 마. 외식 한번 할래?" 김영수의 머릿속엔 남편이 회사에서 잘릴까 봐 노심초사하던 아내를 달래고 불과 30초 전 전화를 끊은 일이 떠올랐다. "5년, 아니 3년만 더 있게 해주세요". 김영수의 호소는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인사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정리해고 순서를 고지했다. 김영수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MBC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중년판 '미생'이다. 한명전자를 배경으로 20년 차 안팎의 40대 직장인들의 생존기를 실감나게 그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틀렸다. 중년도 아프다. 22년 차 엔지니어 최반석(정재영)과 18년 차 인사팀장 당자영(문소리)은 '존버(X나게 버티기란 뜻의 속어)'해야 하는 'K가장'이다. 상사에 미운털이 콕 박혀 인사팀으로 쫓겨나다시피 해도, 유리천장에 막혀 본사에서 지방 사업부로 발령을 받아도 버티고, 버틴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직장생활에 출구는 없다.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중년 관리직의 '짠내'는 짙다. 계약직('직장의 신'· 2013) 혹은 신입('미생'·2014)의 고군분투와 결이 다르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너희 같은 기술쟁이는 기술이라도 있지, 나 같은 인사쟁이 40대는 재취업도 안 돼." 당자영은 두 남성 기술자를 향해 고함을 지른다. 늘 눈이 시뻘겋던 TV 밖 현실 속 '오성식 과장('미생'·이성민)'들의 아우성이 메아리친다. 이 공감을 발판 삼아 '미치지 않고서야'는 온라인에서 중년 직장인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사무실의 정치학, 깊이 공감된다'(leesangji*****), '드라마가 아니라 '찐' 현실, 어머니가 드라마 보면서 내 생각이 난다더라'(iamyou*****) 등의 글이 올라왔다. 시청률은 한 자릿수지만, 시즌제 요구도 나온다. "뒤엉키고 흔들리는 중년 관리직을 과장되지 않게 그려 회사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공감대를 형성"(공희정 방송평론가)한 덕분이다. 김호준 '미치지 않고서야' 제작총괄은 10일 "자기 의지대로 살기 어려운 중년 가장이 직장 등 시스템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간 직장 드라마는 오피스물이거나 현장 노동자물로 양분됐는데 이 두 장르를 적절히 섞고, 전자회사의 낯선 개발실 사람들을 보여줘 새로움을 준 게"(작가 박생강) 다른 직장 드라마와의 차별성으로 작용했다.
정도윤 작가는 '마녀의 법정'(2017)을 끝낸 뒤 4년 동안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 전작에서 성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려는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려 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에선 생존을 위한 직장인들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최반석과 당자영 등 주요 인물들은 1970년대 태어난 90년대 학번, 40대(9·7세대)들이다. '미치지 않고서야'에선 "386세대와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 낀 세대의 애환"(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이 곳곳에 배 있다. 정재영과 문소리는 담담한 연기로 극중 인물의 현실성을 도톰하게 살린다. 문소리 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문소리가 올봄 실제 기업 인사팀 팀장들과 만나 조직 특성과 근무 방식 등을 미리 익힌 뒤 촬영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노병국(안내상) 공정필(박성근) 팽수곤(박원상) 최반석은 창인공전 출신 선후배 사이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같은 의대 99학번 동기인 '99즈(조정석 김대명 정경호 전미도 유연석)'가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에선 창인공전 4인방이 극의 한 축을 담당한다. 관리직이 된 창인공전 4인방은 팀원들이 밥을 먹어주지 않아 구내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다. 학벌 좋은 눈치 없는 후배들에게 큰소리는 못 치고 구시렁거린다.
연기파 중년 배우들은 위아래에 껴 쪼그라든 중간 관리자를 입체감 있게 표현한다. 정재영을 비롯해 안내상과 박원상은 실제 대학로에서 연극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내며 호형호제하는 사이. 격의 없이 서로에게 심드렁하고 때론 궁상맞은 모습은 그래서 더 실감난다. 창인공전 4인방은 한명전자의 생활가전 관련 부서에서 일한다. 전자회사에서 생활가전 파트는 핵심 부서는 아니다. 주변부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이 일하는 연구소의 건물 벽은 페인트칠이 비늘처럼 일었고, 그들이 나오는 화면은 늘 다소 어둡다. 제조업 육성으로 지역 대학 인근에 공장이 잇따라 들어섰지만, 어느덧 하나둘씩 사업을 철수해 '유령도시'가 된 녹슨 현실의 자화상이다.
드라마 촬영지는 경남 창원. 제작진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름 없는' 연기자 20여 명을 출연시켰다. 지역성을 살리기 위해서다. 창원에서 나고 자란 구민혁은 극에 개발3팀 팀장 전명우 역으로 나왔다. 구민혁은 "아내와 함께 드라마에 출연했다"며 "창원시청 로터리에 차가 지나가는 모습, 봉암다리 등의 풍경들을 보면서 이게 현실인지, 드라마인지 왔다갔다할 정도로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