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오전 11시 강원 화천군 상서면 사육곰 농장에 사육곰 구조단체 곰보금자리프로젝트와 동물권행동단체 카라 활동가 11명이 모였다. 이곳 14마리 곰들의 건강을 확인하고 곰사 청소, 과일 급여 등을 하기 위해서다. 두 단체는 지난 5월말 농장을 접기로 한 농장주 A씨로부터 사육곰 15마리(1마리 사망)를 넘겨받은 이후 매주 일요일 농장을 방문해 곰들을 관리하고 있다.
17~25년간 철창에서 자란 사육곰
완만한 경사에 자리한 농장에는 위 아래로 7마리씩 총 14마리의 사육곰이 각각 23㎡(7평) 규모의 철창 속 콘크리트 바닥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공간 부족으로 그나마 사이가 좋은 2마리만 한 칸에서 함께 길러졌다. 곰보금자리프로젝트 공동대표인 최태규 수의사는 "무작정 합사하면 싸우거나 서로 죽일 수 있어서 농장에선 보통 1마리씩 기른다"고 설명했다.
이들 곰은 50~70㎏ 정도로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활동가들은 덩치로 보아 1980년대 일본이나 대만에서 수입된 곰들의 후손으로 추정했다. 새끼 곰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린 곰이 17세, 나이 든 곰은 25세다. 반달가슴곰 수명이 20~25년임을 감안하면 이들 나이는 적지 않은 편이다. 10세가 넘으면 웅담 채취용으로 도축할 수 있지만 농장주는 새끼 때부터 기른 곰들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지금까지 길러 왔다.
미련 곰탱이 아냐… 약만 골라내는 곰들
활동가들은 두 조로 나눠 위쪽 곰들에게 구충제 등 약을 먹이는 동안 아래쪽 곰들에게는 청소를 하면서 과일을 급여하기로 했다. 사람이 다가가자 대부분의 곰은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다가가면 음식을 주는 걸 알아서다.
곰들은 음식을 받아 먹는 게 익숙했다. 이순영 곰보금자리프로젝트 공동대표와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 수의사가 구충제를 넣은 마시멜로를 건네자 대부분의 곰들은 맛있게 받아 먹었다. 곰에게 쓴 약만 주면 먹지 않기 때문에 달콤한 마시멜로 속에 약을 감춘 것이다. 어떤 곰은 더 달라고 철창 밖으로 앞발을 뻗기도 했다.
매일 밥을 주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먹는 곰도, 약만 골라내고 간식만 먹는 곰들도 있었다. 특히 활동가들의 애를 태운 건 14마리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보금이'다. 25세의 노령곰인데 오른쪽 뒷다리가 불편해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끌면서 항문 쪽 상처가 깊어졌다. 엉덩이 털은 빠졌고 상처에는 파리가 끓었다. 다른 곰보다 약을 많이 먹어야 하는데 보금이의 입맛은 무척 까다로웠다. 이 대표와 박 수의사는 꿀물, 주스에 약을 타 먹이기도 하고 빵과 땅콩잼에 약을 섞어 주면서 보금이를 달랬다.
좋아하는 과일도, 성격도 다 달랐다
곰사 청소를 위해 장대로 철창을 치며 소리를 내자 곰들은 알아서 내실로 들어갔다. 이는 태어나자마자 지금까지 최소 10년 넘게 학습해 온 결과다. 곰들은 스스로 내실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청소하는 동안 한 명의 활동가는 문 앞을 지켰다. 청소가 끝나자 곰들에게 얼린 토마토와 참외, 멜론 등이 주어졌다. 활동가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한 행동풍부화의 일환으로 곰들이 찾아먹을 수 있도록 과일을 철창 사이나 철창 위에 놓아 주었다.
곰들은 내실에서 나오자 마자 과일을 움켜쥐고 허겁지겁 먹었다. 과일 먹는 순서와 선호하는 과일은 제 각각이었다. 입맛이 뚜렷해 특정 과일을 먹지 않는 곰도 있었다. 철창 위에 달린 토마토를 먹겠다고 몸을 늘려 길게 서는 모습에 활동가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최 수의사는 "해외에서 운영되고 있는 곰 보호소(생크추어리)에서는 개체별 성격과 특징은 물론 선호하는 음식까지 관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더위 속 좁은 물통에 몸을 구겨 넣는 곰, 사람이 호스로 물을 뿌려주자 몸을 돌려가며 샤워를 만끽한 곰은 활동가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들은 이제 윗줄 첫 번째, 아랫줄 다섯 번째가 아닌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예정이다.
지루함과 스트레스에 정형행동… 1마리는 사망
이 농장의 사육환경은 뜬장에서 잔반을 먹이며 관리하는 다른 농장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곰은 지루함과 스트레스로 정형행동(비정상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였는데, 일부는 머리를 좌우로 반복적으로 크게 흔들었다.
구조 후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6월 초 활동가들이 찾았을 때만 해도 우리 안에 놓인 과일을 소중히 끌어안고 먹던 15마리 가운데 아랫줄 두 번째 곰이 내실로 들어간 이후 아예 나오질 않은 것이다. 활동가들이 1주일 후 농장을 찾아 장대에 카메라를 달아 내실 안을 관찰했지만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곰스프레이 등을 들고 내실에 들어가 곰의 죽음을 확인했다. 사체 부패가 심해 사망 원인은 찾기 어려웠다. 활동가들은 이제라도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편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빈 땅에 묻어 주었다.
내년 보호시설 목표… 사육곰 구조 롤모델 될 것
농장주의 부친은 해당 부지에서 사슴농장을 운영하다 정부의 곰 사육 권장 정책에 따라 1984년부터 곰을 길렀고 현 농장주가 뒤를 이어 운영해왔다. 농장주는 당초 곰들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면서 농장을 닫아야 했고, 고민하던 중 2019년부터 사육곰 농가에 해먹을 달아주는 봉사활동을 해온 곰보금자리프로젝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곰보금자리프로젝트 역시 곰들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인력과 재정상 단독으로 곰들을 구조하기는 무리였다. 다행히 사정을 들은 카라가 사육곰 구조와 초기 보호시설 설립 비용, 홍보를 돕기로 했다. 카라 활동가 고현선씨는 "평생 무기징역수처럼 살아온 농장 속 곰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라며 "상업적으로 사육되던 곰들을 구조, 보호하는 생크추어리가 있는 베트남과 중국처럼 우리도 이번 기회에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두 단체는 내년 여름 경기 고양시에 사육곰 보호시설을 짓는다는 목표다. 아직 보호시설 인허가, 설립 비용 마련 등 과제가 남아 있지만 보호시설 필요성에 대해 알리면서 주민과 지자체를 설득하고 펀딩을 통해 비용을 마련해 간다는 계획이다. 그 때까지 활동가들이 가지 않는 평일에는 농장주 가족이 곰들을 돌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에는 27개 농가에서 웅담 채취용 397마리, 불법 증식된 전시관람용 23마리의 곰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있다. 정부도 전남 구례군에 보호시설을 지을 예정이지만 수용 능력은 75마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14마리 외 일부는 지자체가 맡고, 일부는 동물단체가 해외로 보낸다는 목표지만 그래도 300마리는 갈 곳이 없다.
최태규 수의사는 "남은 사육곰들을 위해서는 결국 보호시설을 짓는 게 최선"이라며 "가능하다면 앞으로 지을 보호시설을 확대해 수용 능력을 높이고, 다른 보호시설 건립에도 도움이 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화천=고은경 애니로그랩장 scoopkoh@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