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각국의 'K팝 키즈'들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K팝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 선수 즉 K팝 키즈가 올림픽의 풍경을 확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K팝 키즈는 경기장에서 K팝의 언어로 말하고 행동한다. ①서양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②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자기 긍정 메시지가 두드러진 K팝의 특성을 닮아, 지역성에 갇히지 않고 당당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이다. 국위 선양에 짓눌려 늘 엄숙했던 옛 선수들과 확연히 결이 다른 선수가 등장한 배경이다.
K팝 키즈는 올림픽을 앞두고 태평양 넘어 미국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달 미국 지상파 NBC 방송을 통해 중계된 국가대표 선발전 수영 여자 자유형 1,500m 예선. 플랫폼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선수가 TV 화면에 잡혔다. 양손으로 줄을 잡아당긴 뒤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춤을 추는, 트와이스의 히트곡 '치얼업' 안무였다. 오디션장도 아닌 미국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K팝 댄스라니. 이 K팝 키즈는 미국 수영 국가 대표를 다섯 번이나 지낸 시에라 슈미트(23) 선수다. 그는 4일 본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나눈 인터뷰에서 "경기 전 자신감을 얻기 위해 K팝을 듣고 춤을 췄다"고 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선수가 왜 미국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가 아닌 언어도 낯선 K팝으로 준비 운동을 하며 힘을 얻으려는 걸까. 슈미트는 "K팝은 열정적이며 들으면 행복해지고, 메시지가 긍정적이라 좋아한다"며 "K팝을 듣고 경기에 나가면 최선을 다하게 된다"고 했다. 3년 전, 미국 뉴욕 퀸즈 시티 필드에서 열린 방탄소년단 공연에서 기자와 만난 제이미(18·버지니아)는 "다른 팝스타들이 (음악에서) 돈 얘기만 할 때 방탄소년단은 삶을 얘기한다"며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들을 때 꼭 가사를 번역해 본다"고 말했다. 미국 Z세대가 현지 팝송에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청춘 성장 이야기를 K팝에서 찾으면서 K팝이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 된 것이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2016년 이화여대생들이 대학 본부 점거농성 중 학교에 투입된 1,000여 명의 경찰 앞에서 서로 팔짱을 키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러 K팝의 시대성을 보여줬다"며 "미국 Z세대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 K팝으로 마음을 다잡는다는 건 K팝이 그들의 팝송이 됐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방탄소년단은 '너를 사랑하라'란 뜻의 '러브 유어셀프'를 주제로 시리즈 앨범을 내고, 블랙핑크는 '포에버 영'에서 "후회 없는 젊음이 타오르게"라고 노래한다. 청춘의 언어로 가득 찬 K팝이 Z세대의 팝송이 돼 일상 곳곳에서 K팝 DNA가 툭툭 튀어나오는 이유다.
슈미트는 안타깝게 도쿄행에 합류하지 못했다. 출전했더라면 그는 수영장에서 어떤 춤을 췄을까. 400m 자유형에선 트와이스의 ‘예스 오어 예스'를, 1,500m에선 (여자) 아이들의 '모어'를 췄을 것이라는 게 슈미트의 말이다.
K팝 키즈는 경기장을 혈투가 아닌 축제의 장으로 만든다.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양궁 3관왕을 차지한 안산(20)은 도쿄올림픽에 '무봉'(그룹 마마무의 응원봉) 배지를 달고 나갔다. K팝 키즈는 몸에 '필승'이 새겨진 문신이나 장신구 대신 운동복에 팬덤의 상징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국가 대표이기에 앞서 청춘이고, K팝 키즈란 정체성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산은 여자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건 뒤 "지금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국내 취재진의 질문에 "여름이었다"고 답했다. 여름은 그룹 우주소녀 멤버로, 좋아하는 아이돌 이름을 활용해 '누구처럼 좋다'는 팬덤의 언어로 Z세대 운동 선수는 우승 소감을 대신했다. 올림픽 무대를 신성시했던 옛 선수와 다른 '신인류'의 등장이다. 안산은 최근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우주소녀 여름과 SNS로 주고받은 메시지 캡처 화면을 올렸다. 안산은 "(우주소녀 여름이) 응원해줬다"며 "여름이었다(이것을 위한 인터뷰 빌드업이었음). 사랑한다. 우주소녀 '눈부셔' 들어달라"고 했다.
국내 최연소로 여자 탁구 대표팀에 선출된 신유빈(17)은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힘들 때 '쩔어(대단하다는 뜻의 인터넷 속어)'를 들으면 어느새 나도 좀 쩌는 것 같아 긴장이 풀린다"며 "도쿄에서 쩌는 모습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딱 봐도 '아미'(방탄소년단 팬)의 언어다. 방탄소년단 3집엔 '쩔어'란 노래가 실려 있고, 신유빈은 아미로 유명하다.
도쿄올림픽 경기장 곳곳에선 K팝이 울려 퍼졌다. 중국과 미국의 여자 배구 경기와 플라이급 여자복싱 우간다와 일본 선수의 경기에선 방탄소년단의 '버터'가, 여자 체조 경기장에서 미국 선수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힐 땐 있지의 '돈 기브 어 왓'이 흘렀다. 위안부와 독도 등 정치적 문제로 일본 지상파 방송사가 K팝 소개를 그간 꺼려왔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 노출이다.
트위터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간 전 세계 트위터에서 K팝 관련 트윗은 75억 건이 이뤄졌다. 올해 기준 세계 인구수(약 78억 명)와 비교하면, 각국의 시민 1명당 한 번꼴로 K팝 관련 메시지를 트위터로 지인과 주고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올림픽은 대규모 국제 행사고, 그곳에 출전한 10~30대 각국 선수들에게 가장 친숙한 음악이 K팝이라, 주최 측도 용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관계자는 "도쿄올림픽의 경우, 일본 올림픽조직위가 일본 저작권협회(JASRAC)에 음악 사용 승인을 받고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올림픽에서 사용된 K팝의 저작권 사용료는 일본 저작권협회가 징수, 한국의 음저협으로 송금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K팝 외국 사용료는 151억 원 징수됐다. 2017년엔 81억 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