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불운한 성화, 환영받지 못하며 도쿄를 밝히다

입력
2021.07.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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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올림픽 성화 릴레이가 힘겹게 끝을 봤다. 지난해 3월 12일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성화가 채화된 지 무려 499일 만에, 최종 주자로 선택된 일본 여자 테니스 간판 스타 오사카 나오미(24)의 손에 성화대로 옮겨졌다. 성화는 지난해 채화 후 일주일간 그리스를 누비다 특별수송기로 일본에 도착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올림픽 개최 1년 연기가 결정되며 길을 잃었다. 1년여가 흐른 3월 25일에야 일본 후쿠시마현 J-빌리지에서 출발한 성화는 121일째 되는 23일, 개회식이 열린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신국립경기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장엔 성화를 반겨주는 관중은 없었고, 되레 경기장 밖에서 성화 점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외친 목소리만 닿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1년 미뤄진 2020 도쿄올림픽이 23일 오후 8시 올림픽스타디움에서 막을 열었다. 개최지인 일본 도쿄도 내 코로나19 긴급사태 발효로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무관중 개회식으로 기록됐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중국 등 해외 정상들도 개회식에 불참한 데다, 대회 개최 일등공신인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회식 책임자들이 각종 스캔들로 개막 직전 물러나 공연 의미도 퇴색되면서, 관중과 축하, 감동이 실종된 ‘3무(無) 개회식’이 됐다.



스가 "성화는 희망의 등불" 바흐 "어두운 터널의 빛"

약한 비가 흩뿌리던 개회식에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올해는 동일본 대지진 10주년 되는 해로, 성화 릴레이는 후쿠시마현의 J-빌리지 스타디움에서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올림픽 스타디움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는 성화대가 설치됐다”고 말했다. 이어 “안전한 도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희망을 공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도쿄올림픽은 이 어두운 터널의 끝에 있는 빛”이라면서 “주최측의 놀라운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일본을 치켜세웠다. 일본 상징인 후지산을 형상화한 조형물 위엔 국기의 태양을 상징하는 ‘구(球)’ 형태의 성화대가 자리했다. 성화 점화를 앞두고 꽃처럼 열리는 형태로 만들어진 성화대를 두고 조직위는 “생명력과 희망을 구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성화는 올림픽스타디움, 그리고 아리아케 인근에 각각 설치돼 17일간 도쿄를 밝힌다.

대회가 1년 미뤄진 사이 집에서 몸을 풀며 올림픽을 고대한 선수들과 전 세계인들의 영상으로 시작된 개회식 첫 공연의 주인공은 간호사와 복싱 선수를 겸하는 츠바타 아리사였다. 그는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이번 올림픽 복싱 예선전을 준비했지만, IOC가 7월에 열릴 예정이던 예선전을 취소하고 그간의 세계랭킹에 따라 출전권을 배정하면서 올림픽 진출 꿈이 좌절됐다. 조직위는 그런 그를 개회식 주인공으로 낙점했다.


한국 103번째로 입장…김연경 등 30명만 참석

17일간의 올림픽과 그 앞날을 밝힌다는 의미를 담은 수백 개의 등불이 들어서고, 앞서 도쿄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1964년에서 2020년까지의 역사를 담은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개회식 시작 40분 만인 오후 8시 38분, 웅장한 환영 음악과 자원봉사자들의 박수 속에 그리스 선수단을 시작으로 선수단이 입장했다.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난민대표팀이 들어선 뒤부턴 개최 국가(일본) 언어 순으로 입장했다. 입장 순서 맨 끝엔 차기 개최국인 미국과 프랑스, 개최국인 일본 선수단이 들어섰다.

전체 선수단 가운데 103번째로 입장한 한국은 ‘배구 여제’ 김연경(33)과 ‘수영 기대주' 황선우(18)를 기수로 내세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불참한 본부석에선 IOC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비록 선수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인생에서 흔치 않은 경험을 눈에 담으려는 듯 스태프, 다른 나라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33개 종목(세부종목 324개)이 열리는 이번 대회에 한국 선수단은 29개 종목에 출전한다. 232명의 선수(임원 122명)가 나서는 한국 선수단의 이번 대회 목표는 금메달 7개와 종합 10위다. 개회식엔 럭비와 사격, 수영, 배구 선수단과 임원 6명을 포함해 30명만 참석했다.


개회식장에선 거리 두기 실종, 밖에선 개최 반대 시위

그럼에도 이번 대회는 개막 전부터 뻥 뚫린 방역, 대회 관계자들의 ‘스캔들 릴레이’, 일본 국민들의 무관심이 겹치면서 역대 가장 환영받지 못한 개막이란 평가를 받는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이 올림픽을 즐기길 바라며 개막 전날인 22일(바다의 날)부터 25일까지 4일간의 연휴를 줬지만, 도쿄 시민들은 코로나19와 더위를 피해 도시를 떠났다.

남은 시민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이 대회에 반감을 드러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은 ‘행동’에 나섰다. 이날 개회식이 열린 올림픽스타디움 밖에서 열린 올림픽 개최 반대 시위 구호는 개회식장이 조용해질 때마다 들려왔다. 개회식장에선 수천 명의 선수와 임원들이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거리 두기를 잊은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선수촌 내 확진자 증가세도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을 거란 불안감은 커졌다. 무사히만 끝나주면 감사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올림픽이 시작됐다.

도쿄= 김형준 기자
도쿄= 최동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