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유미는 한때 홍상수 감독 영화의 주요 출연자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를 시작으로 ‘옥희의 영화’(2010), ‘다른 나라에서’(2012), ‘우리 선희’(2013)에 출연했다. ‘옥희의 영화’와 ‘우리 선희’에서는 주인공 옥희와 선희를 연기했다.
홍 감독의 특이한 캐스팅 방법과 독특한 촬영 방식은 유명하다. 촬영 2, 3주 전 배우에게 기습적으로 전화를 한다. 어느 날에 시간이 있냐고 묻고선 여유가 있다고 하면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기습 부탁을 한다고 한다. 홍 감독 영화는 워낙 저예산이라서 의상감독이라는 역할이 딱히 없다. 배우들이 맡게 된 인물의 분위기에 맞춰 알아서 각자 의상을 챙겨 촬영에 임한다. 배우가 평소 입던 옷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정유미가 매번 자신의 옷을 입고 연기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 홍 감독의 영화를 보면 내용에 맞춰 의상까지 고르는 정유미의 안목, 평소 패션 스타일 등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홍 감독의 영화 속 인물 대부분이 그렇듯 정유미가 맡은 역할의 외형은 평범하다. 그가 입은 옷들 역시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옷들이다. 스타라는 수식과는 거리가 멀고도 먼 자연인 정유미의 일상, 배우 정유미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늠할 수 있다.
정유미의 이력은 특이하다. 화제작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진 않았으나 데뷔 과정이 초라하다고 할 순 없다. 여느 배우들과 달리 단편영화가 그의 데뷔작으로 꼽힌다. 김종관 감독의 6분짜리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연기가 워낙 인상적이어서다. 2000년대 중반 영화 팬들 사이에서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반드시 봐야 할 영화로 종종 지목됐고, 정유미라는 배우가 함께 호명되곤 했다. 젊은 감독들은 순수하면서도 반항기가 깃든 정유미의 눈에서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에너지를 발견한 듯하다. 당대 촉망받던 정지우 감독과 정윤철 감독 등이 ‘사랑니’(2005)와 ‘좋지 아니한가’(2007)에 잇달아 캐스팅하며 정유미는 충무로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활동 초기 정유미의 이미지를 잘 활용한 영화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이다. 정유미는 오랜 연인 경석(봉태규)이 있는데도 여러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나누는 채현을 연기했다. 경석이 ‘문어발 사랑’에 참다못해 불만을 터트리자 채현은 이렇게 말한다. “헤픈 게 나쁜 거야?” 해맑은 얼굴로 당돌하게 대답하는 채연의 모습에 웬만한 관객은 저 알 듯 말 듯한 말에 설득당한다. ‘가족의 탄생’ 속 엉뚱한 면모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젤리 모양의 악귀 퇴치를 위해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안은영(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과 맞닿아 있다.
정유미의 선한 인상을 역으로 활용한 영화는 ‘염력’이다. 그는 도심 재건축 사업을 위해 범죄조직과 결탁하는 재벌가 홍 상무를 연기했다. 홍 상무가 갑자기 초능력을 가지게 된 신석헌(류승룡)에게 “진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죽거릴 때 ‘도가니’(2011)나 ‘부산행’(2016) 속 정유미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름난 배우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스타 의식을 발휘한다. 인기에 취해 거만해져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가 있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동료 배우들과 괜한 기 싸움을 하거나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 2009년 할리우드 스타 조시 하트넷과 일본 배우 기무라 다쿠야, 한국 배우 이병헌은 함께 출연한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무대 인사 등 여러 행사를 소화했는데, 한번은 세 사람 모두 행사장에 먼저 모습을 비치길 거부했다고 한다.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의식에다 각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존심으로 서로 다투면서 행사 시작이 몇십 분 늦춰졌다. 애먼 행사 관계자만 애가 탈 수밖에.
정유미는 어떤 배우일까. 영화인들은 정유미를 스타 의식이 전혀 없는 배우라고 평가한다. 인터뷰를 위해 정유미를 두 번 만났는데, 영화인들의 평가에 100% 동의한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딱히 신성시하지 않고, 자기의 지명도를 신기하게 여기는 인물인 듯했다. 그저 연기가 하고 싶어 배우가 됐는데, 배우 활동을 하다 스타가 된 자신에 스스로 놀라고, 이런 상황을 쉬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 정유미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러나 역할마다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배우이기에 20년 가까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