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마이너스 37달러까지 추락했다. 원유를 팔면서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달 초 WTI 가격은 76달러도 넘어섰다. 2018년 10월 이후 최고치로, 코로나19 직전 유가 수준보다도 높다. 일각에선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를 것이란 전망까지 내놨다. 이 경우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0원을 훌쩍 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18일 주요 산유국 간 협의체인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가 증산에 전격 합의하며 유가는 오히려 하락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신도 모른다는 유가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은 하루 1억 배럴 안팎이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시장에서 거래되는 원유의 양을 더하면 하루 10억 배럴도 넘는다. 이는 유가의 금융화 특성을 잘 보여준다. 국제 석유 시장엔 실물 석유가 필요해 참여한 당사자보다 차익 거래를 노리고 뛰어든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 등의 투자자가 더 많다는 얘기다. 이들은 정유시설이나 저장탱크가 없는데도 원유 선물(미래에 정해진 가격으로 원유를 살 수 있는 권리)을 사들인 뒤 가격이 오르면 되판다. 이 경우 선물 만기일까진 이를 청산하거나 차월물로 변경(롤오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지난해처럼 실물 원유를 인수해야 해 마이너스 가격에도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마치 주가처럼 국제 유가는 작은 변수 하나에도 출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는 선물 거래보다는 실물 거래가 일반적이다. 지난해 WTI가 마이너스 40달러까지 추락하는데도 두바이유는 20달러 안팎을 유지한 이유다.
그러나 역시 가격을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건 수급이다. 지난해 유가가 폭락한 것도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전 세계 경제가 멈춰 서며 석유 수요가 급감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여기에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까지 실패하며 수급 불균형이 깨진 게 결정타가 됐다. 반면 수요가 줄어도 감산으로 공급이 함께 감소하면 가격은 유지된다. 결국 국제 유가의 방향은 산유국들이 공급량을 조절하는 데 합의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중요한 게 바로 ‘OPEC+’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13개 산유국 모임인 OPEC와 러시아 등 10개 비OPEC 산유국 간 협의체다. ‘원유 가격 안정화’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고유가를 유지하며 생산량도 늘려 산유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목표인 국제 담합 카르텔이다. 지난해 감산 합의가 결렬되고 WTI가 마이너스 가격으로 추락하자 깜짝 놀란 OPEC+는 곧바로 회의를 열고 하루 1,000만 배럴 감산을 결정했다. 전 세계 하루 생산량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이후 국제 유가는 점차 안정을 찾으며 반등했다. OPEC+는 각국의 경기 부양으로 유가가 꾸준히 오르자 이에 맞춰 감산 규모를 줄이면서 사실상 증산해 왔다. 하루 1,000만 배럴에 달했던 OPEC+의 감산량은 현재 580만 배럴로 축소된 상태다.
변수가 생긴 건 이달 들어서다. 1일 열릴 예정이던 OPEC+ 회의는 2일, 다시 5일로 연기됐고 결국 합의는 나오지 못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자국의 생산 기준 상향 조정을 주장하며 탈퇴 배수진을 쳤기 때문이다. 협상 결렬에 유가가 오르고 국제 사회의 압력이 커지자 18일 OPEC+는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UAE의 원유 생산 기준은 하루 320만 배럴에서 350만 배럴로 상향됐다. 이라크, 쿠웨이트, 러시아의 원유 생산 기준도 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기준은 내년 5월부터 적용된다. OPEC+는 내년 4월까지였던 감산 완화 합의 기한도 내년 연말까지 연장했다.
물론 아직 풀어야 할 문제는 남아 있다. UAE의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누군가는 생산량을 줄여야만 한다. 일단 OPEC+의 맹주인 사우디가 희생을 감수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예외 인정에 불만을 품고 똑같은 방식으로 증산을 요구할 수도 있다. OPEC+의 합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국제 유가의 불확실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늘면서 석유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공급이 불안해지면 가격은 다시 뛸 수도 있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감안해야 한다.
일부 투자은행과 투기 자본은 이런 점을 부각시키면서 고유가 시대가 열릴 것으로 점친다. 뱅크오브아메리카도 최근 여행 수요가 늘면서 내년엔 유가가 100달러가 될 것이란 전망치를 내놨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원자재 정보 업체들도 연말 또는 내년 초 100달러 시대 진입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에 대해 정준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팀장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확률은 매우 낮다”고 지적했다. 최근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올해 평균 유가를 66달러로 수정 전망했다. 최근 유가 수준보다 10달러 가까이 낮다. 실제로 국제 유가는 앞으로 상승보다는 하락할 이유가 더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반론이다.
첫째, 코로나19 델타 변이의 확산이다. 이미 110여 개국으로 확산되며 전 세계가 3차 대유행 초입에 진입했다는 게 세계보건기구(WHO) 판단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요국인 미국의 일일 확진자 수도 1만 명 수준에서 다시 3만 명 선을 넘어섰다.
둘째,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도 주목해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8년 일방적으로 깬 이란과의 핵합의를 복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르면 8월 중순 협상이 재개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광래 삼성선물 선임연구원은 “협상이 진전을 이뤄 대이란 제재가 풀릴 경우 이란산 원유가 국제 시장에 추가로 하루 최대 200만 배럴까지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물론 이란의 부상이 못마땅한 이스라엘의 방해 공작이 이어지고 내달 취임하는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테헤란의 도살자’란 별명을 가진 초강경파란 점에서 협상은 속도 조절을 할 수도 있다.
셋째, 지금도 OPEC+는 언제든지 하루 500만 배럴 이상 증산할 여력이 있다. 만약 유가가 오르면 OPEC+의 감산 합의는 한순간 무너질 공산이 크다. 각 산유국이 증산의 유혹을 떨치긴 힘들기 때문이다. 일부 OPEC 산유국은 수출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80%도 넘는다. 특히 최근 러시아는 강력한 증산을 요구하고 있다.
넷째, 미국과 중국 모두 고유가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5.4% 올라 13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휘발유 가격이 1년 만에 44% 치솟은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인플레이션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미 정부는 OPEC+의 증산을 독려하고 있다. 백악관은 “미국은 OPEC+ 회담에 따른 세계 경제 파급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도 상반기 경제가 12.7%나 성장했지만 같은 기간 원유 수입은 오히려 3% 줄었다. 중국의 원유 수입이 감소한 건 2013년 이후 처음이다. 고유가는 총수요를 줄여 산유국에도 부정적이다.
다섯째, 탄소중립에 대한 요구가 커지며 원유 수요가 늘어나는 데 한계가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촌 폭염과 기상 이변 등이 이어지며 전 세계적 탈석유 흐름은 갈수록 거세질 전망이다. 네덜란드에선 환경 단체가 로열더치셸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나 줄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차 확산에 따라 석유류 수요는 장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애널리스트는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유가 100달러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실 우리가 국제 유가를 체감하는 건 휘발유 가격이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오피넷)에 따르면 7월 둘째 주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리터당 1,628원을 기록했다. 5월 이후 11주 연속 오름세다. 서울은 13.6원 상승한 1,710원까지 올랐다. 서울 휘발유 가격이 1,700원을 돌파한 건 2018년 11월 이후 2년 9개월 만이다.
국내 유가의 선행지표인 국제 휘발유 가격도 계속 상승세다. 국제 가격이 국내에 반영되는 데 2, 3주 소요되는 걸 감안하면 휘발유 가격은 앞으로도 2, 3주 계속 오를 게 확실하다. 그러나 OPEC+의 증산 합의 등을 감안하면 그 이후에도 강세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석유 제품이 정유사에서 주요소까지 공급되는 데엔 시간이 걸리는 만큼 국제 유가가 떨어져도 소비자가 가격 하락을 체감하는 데엔 시차가 존재한다”며 “이를 감안해 알뜰 주유 시기를 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