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한 약재 농가를 운영 중인 김모(61)씨는 지난 주말부터 전력난 대비에 들어갔다. 전력이 장시간 끊길 경우를 대비해 저온저장창고에 보관 중인 농작물 가운데 상대적으로 값 나가는 약재 종자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다. 아이스박스와 아이스팩 등을 다량 준비했다고 밝힌 그는 18일 “폭염이나 태풍 등으로 전기가 끊겼을 때 피해보상도 명쾌하지 않아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며 “축사를 운영하는 농가들은 환기와 냉방장치 가동 중단으로 인한 집단폐사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가발전기나 정전 경보기를 설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번 주부터 올여름 들어 가장 강력한 폭염이 예고되면서 전력난에 '빨간불'이 켜졌다. 때이른 무더위로 냉방시설 가동이 늘고, 산업 생산 증가로 인한 전력 수요도 많아지면서 공급 예비전력은 예년보다 일찍부터 안정권을 벗어났다. 여기에 2018년 여름 111년 만에 찾아온 폭염의 원인으로 꼽힌 ‘열돔 현상’까지 예고되면서, 예비 전력 비상단계 돌입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단 분석도 나온다. 열돔 현상은 지상 5~7㎞ 높이 대기권 중상층에 발달한 고기압이 반구 형태의 지붕을 만들어 뜨거운 공기를 지면에 가둬 폭염을 일으키는 상황을 뜻한다. 곳곳에서 전력 대란에 따른 자구책 마련에 들어간 이유다.
이날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더위가 지속된 지난주(12~16일) 전력공급 예비력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이다. 전력공급 예비력은 공급능력에서 현재 사용 중인 전력을 제외한 수치다. 10기가와트(GW)를 넘겨야 안정적 수준으로 여겨지지만 13일엔 8.8GW까지 떨어지면서 지난주 내내 두 자릿수 사수가 힘겨웠다. 지난해엔 8월 25일에야 10GW 밑으로 떨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7월 말 전력 사용량이 폭증할 경우 전력수급의 비상 단계 돌입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예비력이 5.5GW 밑으로 내려가면 발령되는 전력수급 비상 단계는 총 5단계로 나뉜다. 1단계 준비(5.5GW 미만), 2단계 관심(4.5GW 미만), 3단계 주의(3.5GW 미만), 4단계 경계(2.5GW 미만), 5단계 심각(1.5GW 미만) 순으로 구분되는데, 전력거래소는 “올여름 전력수급 비상 단계 1, 2단계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면서도 “다만 이상고온 등으로 인해 단계가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며 경계했다.
전력 예비율(예비력을 수요로 나눈 백분율)도 한 자릿수 진입이 코앞인 데다, 수도권은 물론 비수도권 사회적 거리 두기까지 강화되면서 가정에서의 야간 전력 수요도 늘어날 공산이 크다. 전력 대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할 경우 '대규모 정전(블랙아웃)' 직전까지 내몰렸던 2011년 9월 15일의 순환정전 사태도 재현될 수 있단 얘기다. 짧은 정전만으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 농가나 식품 유통업에선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배경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재작년 강원 화천군 한 양돈농가에선 1시간여 동안 정전이 발생해 창 없는 축사에 있던 돼지 100여 마리가 질식사했고, 2018년 8월엔 충남 당진군 한 양계농장도 정전으로 송풍시설이 멈추면서 닭 8만7,000여 마리가 집단 폐사했다. 정전에 대비해 자가발전기와 정전 경보기 설치 등이 필요한 이유다. 가정에서도 얼음물이나 양초 등으로 단기 정전사태를 대비할 수 있다.
한편, 한국전력은 21일 전력수요 급증 상황을 가정해 전력수급 비상 모의훈련을 진행, 이를 통해 전력거래소의 비상 단계 발령 시 행동 매뉴얼에 따라 대국민 홍보 등 상황 보고 체계를 점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