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삶의 방식이 가장 크게 달라졌던 시기다. 아이를 들쳐없고 돌아다니면서 먹거리를 구하고, 밤이면 쉴 곳을 찾아다니던 '노마드 시대'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한 곳에 오래 눌러 앉아서 살 수 있게 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정주생활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주거생활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삶의 모든 면을 바꾸어 버렸다. 육아방식이 달라지고 음식물 저장방식이 생겨나는 ‘부엌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처음으로 발명된 토기를 이용해 음식물을 끓여서 국이나 찌개를 만들어 먹는 음식 섭취 방식으로 영양 상태가 개선되었고, 아이 이유식이 가능해짐에 따라 유아사망률을 크게 감소시키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할 수 있었다. 신석기 혁명은 농경의 시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빙하가 물러난 다음 지구상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8,000년 전 우리나라의 초기 신석기시대 유적, 아마도 한반도 내에서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고 알려진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鰲山里) 유적도 그러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곳이다. 1980년대 초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임효재 교수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기의 새로운 토기인 아가리 시문토기(오산리식 토기), 그리고 융기선문토기와 그 유명한 토제 얼굴 조각품 등을 처음으로 발굴해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한 유적이다.
그 후에 진행된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에서는 구석기 문화층도 발견되었다. 공백으로 남아있던 구석기시대 말엽과 신석기시대 시작 사이 시기의 문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열쇠가 될 만한 유적이다. 사실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 토기가 1만5,000년 이전에 나타나기 때문에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시작에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이 발굴에서도 물개나 곰 등의 동물 조각들이 추가로 발굴돼 한국원시미술의 원류를 엿볼 수 있다. 상징물이나 미술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양양에서 강릉 방향 국도를 타고 남대천을 건넌 뒤 작은 언덕을 오르기 직전 좌회전해 바닷가가 보일 때까지 동쪽 길을 따라가면 ‘오산리선사박물관’이 등장한다. 박물관 동편의 솔숲 속에 원형 집자리들이 복원되어 있는데 바로 발굴된 지점들이다. 박물관 앞으로는 엄청나게 넓은 갈대밭이 조성돼 방문객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서쪽의 야산에서 내려오는 동명천의 양쪽에 쌍호(雙湖)라는 크고 얕은 호수가 있었고, 그 동편의 모래 언덕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들이 발견되었다. 쌍호를 메워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흙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적 옆으로 흐르는 동명천은 200~300m 동쪽에서 바다를 면한 오산과 만나게 되는데 그 옆으로 어촌인 오산리 마을이 있다. '오산'이라는 명칭은 낙산사에서 보면 자라가 춤추는 모습이라고 하여 오무(鰲舞)라고 부르다가, 오산으로 바뀐 모양이다. 이 일대는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며 이루는 호수와 늪지로 구성돼 있는데 이웃한 가평리(柯坪里)라는 지명은 바로 갈대마을이라는 뜻이다. 모래 언덕에는 뿌리에 바람이 잘 통해야 잘 자라는 길숨한 소나무 숲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이 일대의 지명에 송현(솔고개), 송전(솔밭) 등 소나무가 들어 있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선사시대 당시의 풍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솔 그늘 사이에 갈대로 엮은 작은 움집들이 햇빛에 반사되고, 솔바람 속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신석기시대 마을 모습이 연상된다. 몇 년 전 방문했던 에티오피아 리프트밸리의 사바나 관목 숲 속의 코쿤 모양 집에서 이방인 소리에 반라로 튀어나오던 원주민 젊은 아낙의 모습은 내가 선사시대 무공해의 삶을 상상하는 모델이다.
신석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생활 유물인 토기는 선사시대인들의 건강을 획기적으로 바꿔준 발명품이다. 또한 디자인의 개념이 일상 생활에 처음으로 도입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오산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예술품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산화철로 빨갛게 장식한 적색마연토기는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흔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를 바닥이 뾰죽하게 생긴 빗살문토기라고 알고 있지만, 오산리유적에서 발견되는 융기문토기 또는 덧띠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태다. 토기를 장식하는 방법으로는 흙을 알갱이나 끈처럼 만들어 토기 표면에 붙이고 여러 방식으로 변형하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표현한다.
이 토기는 동해안의 유적들, 대표적으로 고성의 문암리, 울주군의 신암리에서 보인다. 또 유명한 부산 영도의 동삼동 유적과 북으로는 연해주 지방에서도 나타난다. 백두산 흑요석이 보여주듯이 동해안을 따라 움직인 문화의 궤적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기문화는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縄文)토기와도 통한다. 이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서해안과는 다른 문화가 흐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나 지속되었는데, 이것이 동해안으로 퍼져나가 융기문토기를 대체하면서 한반도의 보편적인 신석기문화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오산리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토기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 세대가 바느질을 하여 옷이나 이불을 만드는 작업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토기 만들기는 가족 먹거리를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지만 유행에 따라 예쁘게 만들어 집안을 아름답게 꾸미는 작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흙실을 길게 만들어 토기에 그냥 붙이기도 하고 또는 잘라서 콩알 모양으로 장식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손에 묻은 진흙을 꾹꾹 눌러서 보고 싶은 ‘님’의 얼굴을 표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얼굴조각품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또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게 곰이나 돼지 모양으로도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리에서 발굴된 토제 사람 얼굴이나 동물형 토기는 옹기종기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만들지 않았을까.
동해안의 신석기유적은 바닷가의 유적이지만 조개무덤이 없다. 오산리 일대에도 이 지역에서 ‘째복’이나 ‘섭(홍합)국’이라고 부르는 인기 있는 조개요리가 있지만 막상 유적에서는 조개껍데기가 보이지 않는다. 모래 해변에서 흔히 보는 작은 조개 말이다. 그리고 오산 주변은 바위 해안이기도 해서 전복, 소라 등의 조개가 있을 법한데 유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들은 물고기가 흔하기 때문에 자잘한 먹거리에는 신경 안 썼을 수도 있다.
오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낚시바늘은 전 세계 통틀어 획기적인 기술혁신 작품이다. 돌을 갈아서 대롱처럼 길게 만들고 뼈나 나무로 고리부분을 묶거나 접착제로 붙여 낚시바늘을 만들었다. 고성 문암리 유적을 비롯한 동해안 여러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지만 일본의 동해 연안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동해연안문화의 흐름이라고 할 만하다. 돌대롱의 길이가 한 뼘에 달하는 것도 있어서 엄청나게 입이 큰 물고기를 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물고기는 대체로 수심이 깊은 물에서 잡힐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배를 타고 나가 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나무 배의 흔적은 이미 오산리 유적과 동해안 일대의 저습지 유적들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깊은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먹거리가 풍족한 지역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남대천은 회귀성 어족인 연어가 겨울철에 엄청나게 잡히는 곳이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연어 떼들이 있고, 민물과 바닷물이 혼합되는 이 일대는 수자원이 엄청나게 풍부한 생태환경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오늘날 볼 수 있듯이 수온 변화에 따라서 명태나 오징어 떼들이 찾아든다. 아마도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오늘날 미시령 너머 인제군 용대리의 명태 덕장 같은 고기 말리는 풍경들이 이 일대에도 펼쳐졌을 것이다. 일 년 내내 물고기잡이와 갈무리 작업으로 남정네들은 손이 닳고 허리가 아팠을 것 같다.
신석기마을이 기대고 있는 모래 언덕을 넘어가면 모래 해변이 나타난다. 기암들이 나온 곳이 있어서 해변 풍광이 단조롭지 않다. 이제는 큼직한 리조트가 들어서서 가족들이 수영하고 연인들이 속삭이는 해변이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어부들이 동해안 일출이 바위 위로 솟아오를 때 먼 바다로 고기잡이에 나섰을 것이다. 만선을 하고 돌아와서는 오산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파도가 자지러드는 이 해변에서 오후의 늘어지는 햇살에 고기를 말리며 쉬었으리라. 선사시대라고 하지만 오산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넉넉한 살림에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를 만끽하는 낙천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이번 여름 동해로 떠난다면 오산리 선사인이 되어 보는 것도 즐거운 상상의 피서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