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대통령 피살 사태로 혼란에 빠진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 국토안보부(NSA)와 연방수사국(FBI)으로 구성된 합동조사팀을 보냈다. 현지 상황을 검토하고 안정 도모를 위한 병력 파견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다. 암살 사건의 동기나 배후는 여전히 미궁인 가운데, 공석인 정상 자리를 둔 내부 세력 간 ‘권력 다툼’에 더해 갱단까지 투쟁을 선언하며 혼돈은 극에 달하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11일(현지시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아이티 당국의 병력 파견 요청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티 상황이 미국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는 “우리의 국가안보가 위험에 처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병력 파견 요청을 분석하고는 있지만,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다는 의미다. 다만 미국의 지원 방안 등을 살피기 위해 NSA와 FBI 등 정부 부처 합동 조사팀이 이날 아이티로 떠났다고 덧붙였다.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피살 당일인 지난 7일 클로드 조제프 아이티 임시총리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마티아스 피에르 아이티 선거장관은 전날 AP통신 인터뷰에서 “아이티 경찰은 긴급 사태에 대응할 만한 힘을 확보하지 못했다. 우리를 도와줄 소규모 병력을 요청하는 것”이라면서 미국 측과의 통화 사실을 공개했다. 아이티는 유엔에도 파병을 요청했다.
일단 조 바이든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현재로선 아이티에 군사적 지원을 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때문에 현지 파견된 합동 조사팀이 돌아와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이를 토대로 지원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앞서 미국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이던 1915년 당시 아이티 대통령이 성난 시위대에 살해당하자, 군대를 파병했다가 1934년 이후 철군한 전례가 있다.
아이티에서는 모이즈 대통령의 빈자리를 두고 현 총리와 총리 지명자, 상원의장까지 뒤섞여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혼란이 커지고 있다. 현재 조제프 임시 총리가 전면에 나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긴 했지만, 정통성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모이즈 대통령이 사망 직전 지명한 아리엘 앙리 총리 후보자는 자신이 적법한 총리라고 주장하고 있고, 전체 30명 중 10명만 남은 상원은 헌법 규정을 들어 조제프 랑베르 상원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이티에선 정국 혼란 속에 의회 선거가 제때 치러지지 못해 하원의원 전체, 상원의원 20명의 임기가 각각 종료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그렇지 않아도 범죄를 일삼던 갱단마저 더욱 활개를 치며 치안은 극도로 악화하고 있다. 갱단 ‘G9’ 두목인 지미 셰리지에는 전날 영상 메시지에서 이번 사태가 “아이티 국민에 대한 국가적ㆍ국제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경찰 출신의 셰리지에와 일당은 모이즈 대통령의 우파 정당과 결탁했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고 AP통신은 설명했다. 그는 또 경찰과 야권이 ‘역겨운 부르주아’들과 야합했다고 비난하며 “아이티 국민을 위해 무기를 사용하겠다. 전쟁 준비가 돼 있다”고도 덧붙였다.
아이티는 모이즈 대통령 피살 전부터 갱단의 범죄가 급증해 사실상 무법천지 상태가 됐다. 특히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G9’을 비롯, 최소 30개의 범죄조직이 도시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부자들뿐 아니라 서민들도 닥치는 대로 납치해 몸값을 뜯어내고, 주택과 상점을 상대로 절도와 방화도 일삼았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 9개월간 약 1만4,000명의 포르토프랭스 시민이 갱단의 폭력을 피해 집을 떠났다. 극심한 범죄 탓에 상점과 학교가 문을 닫고 대중교통 운행도 중단됐다. 대통령 암살 후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혼란이 이어지며 갱단의 폭력도 한층 더 극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전날 포르토프랭스의 미국대사관 밖에는 시민 수백 명이 몰려들어 아이티를 탈출하고 싶다며 망명을 요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