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州) 북부 라우든카운티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살기 좋은 카운티 중 한 곳이다. 미국 인구통계국이 5년 단위로 집계하는 가구당 연간소득 중위값 조사에서 라우든카운티는 2019년 기준 14만2,299달러(약 1억6,343만 원)를 기록했다. 전국 3,142개 카운티 중 1위였다. 라우든카운티는 또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가장 건강한 카운티’ 같은 조사에서도 항상 10위권 안쪽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런 라우든카운티가 최근 미국 문화전쟁의 핵심 전장이 됐다. 수도 워싱턴 외곽, 인구 42만 명의 조용했던 교외 지역이 ‘비판적 인종 이론’과 트랜스젠더 학생 호칭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시끄럽다. 특히 보수 성향 폭스뉴스가 라우든카운티 교육위원회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판이 더 커졌다.
지난달 22일 열린 라우든카운티 교육위 공청회 자리는 난장판이 됐다. 원래 교육위라고 하면 전직 교육자나 학부모가 위원으로 참여해 예산을 짜고, 점심 메뉴를 논의하고, 교육감을 고용하는 게 전형적 업무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는 200명 넘는 학부모들이 참여해 51명이 의사발언을 진행했고 야유와 고함이 오가다 2명이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다.
이에 앞서 라우든카운티에선 비판적 인종이론 교육을 두고 갈등이 증폭됐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가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의 교육적 진보를 어렵게 하고 학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낮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2년 전에 나왔다. 이에 라우든카운티는 ‘체계적 인종 차별 퇴치 계획’을 확정하고 교사 연수 등을 진행했다.
비판적 인종 이론은 인종 차별을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로 보면서 차별을 조장하는 법과 제도도 정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백인을 타도 대상으로 만드는 이론”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4월 이후 ‘학교를 위한 투쟁’이란 보수 단체를 중심으로 교육위 회의마다 항의 시위가 잇따랐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18일 “전국 교실에서 학생들이 비판적 인종이론으로 알려진 우스꽝스러운 좌파 교리로 세뇌 교육을 받고 있다”는 글을 기고하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흑인 여성이고 카운티 산하 리스버그시 의원을 지낸 바네사 매덕스는 라우든카운티의 부유한 백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WP에 “트럼프의 정치 스타일이 잠자고 있던 인구층을 대담하게 만든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백인 여성이자 오랜 민주당원인 에밀리 커티스는 인종이론에 화가 난 사람이 모두 보수적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세상이 당신의 피부색에 따라 거대하고 체계적이며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세계관으로 가져야 하느냐”라는 논리다. 어떤 결론이 나든 미국 최대 부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ㆍ젠더 갈등의 상처는 쉽게 아물기 힘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