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대통령 암살범은 콜롬비아인 26명·미국인 2명”… 배후는 미궁

입력
2021.07.09 20:00
11면
모이즈 대통령, 총알 12발 맞아… 영부인 고비 넘겨
군사 작전급 범행에 비해 허술한 도주 과정 '의문'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대통령 사저에 침입해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을 암살한 무장괴한들은 콜롬비아인 26명과 아이티계 미국인 2명 등 총 28명으로 이뤄진 일당이었다. ‘외국 용병의 범행’일 것이라는 당국의 초기 추정은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누가 암살의 배후인지, 왜 암살을 계획했는지, 어떻게 내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대통령 사저의 철통 보안을 뚫었는지 등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범인은 콜롬비아인·미국인… 잔당 추적 중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은 8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암살 용의자 28명 중 17명을 검거하고 나머지 8명을 쫓고 있다”고 밝혔다. 체포된 범인 중 15명은 콜롬비아인, 2명은 아이티 출신 미국 시민권자로 확인됐다. 전날 총격전 과정에서 사살된 용의자는 7명으로 알려졌으나 3명으로 정정됐다. 경찰은 수갑을 찬 채 경찰서 바닥에 앉아 있는 용의자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범행 도구인 소총과 칼, 망치, 무전기, 콜롬비아 여권 등 압수물도 증거로 제시했다.

용의자 11명은 아이티 주재 대만 대사관에서 붙잡혔다. 대만 외교부는 “안전문제로 문을 닫은 대사관에 몰래 침입해 숨어 있던 용의자들을 경비요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설명했다. 아이티는 대만을 국가로 인정해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콜롬비아 국적인 범인 중엔 전직 군인들도 있었다. 콜롬비아 정부도 사망자 2명을 포함해 총 6명이 퇴역 군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호르헤 루이스 바르가스 콜롬비아 경찰청장은 “이미 최고의 조사관들로 자체 조사팀을 꾸렸다”며 “아이티 당국에 제공할 용의자들의 출국 일정, 금융 정보 등을 수집 중”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은 아이티계 미국인 용의자 2명에 대해 “35세 제임스 솔라주, 55세 조제프 뱅상”이라고 보도했다. 솔라주는 과거 주(駐)아이티 캐나다대사관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했고, 2019년 미국 플로리다주(州)에서 자선단체를 설립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단체 웹사이트에서도 그는 자신을 캐나다대사관에서 일했던 ‘공인된 외교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캐나다 외무부는 “용의자 중 1명이 현지 민간 보안업체를 통해서 고용돼 2010년 주아이티 대사관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이들의 신원 확인 및 논평을 거부했다.


치밀한 범행·허술한 도주… 배후도 미스터리

전날 새벽 피살된 모이즈 대통령은 총알을 12발이나 맞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건 조사에 참여한 카를 앙리 데스탱 판사는 현지 일간 르누벨리스트에 “시신에서 총알 자국 12개를 발견했다”며 “사저 안팎에서 5.56㎜와 7.62㎜짜리 탄피들도 다수 나왔다”고 말했다. 피습 당시 대통령의 딸은 오빠(또는 남동생) 침실에 숨어 있었고, 가사도우미와 직원은 포박당했다. 사저 집무실과 침실은 온통 헤집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현재 모이즈 대통령의 세 자녀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으며, 중상을 입어 미국으로 후송된 마르틴 모이즈 영부인도 고비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았다.

용의자가 대거 체포되고 피습 당시 구체적 상황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으나, 의혹은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분위기다. 28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어떻게 대통령 사저의 보안을 무력화하고 침입할 수 있었는지, 단시간에 '암살 작전'을 벌이고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왜 도주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경찰에 당일 붙잡히고 말았는지, 파고들수록 의문은 가시지 않고 있다.

실제로 용의자 2명은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중 주민들에게 발각됐다. 군사작전처럼 과감했던 범행 수법에 비해 도피 과정은 지나치게 허술하다. 심지어 비무장 상태였다. 현지 언론인 로벤슨 제프라드는 “고도로 훈련되고 중무장한 특공대 소행”이라는 경찰 설명에 강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아이티 국민들은 분노로 들끓고 있다. 모이즈 대통령이 부패 혐의와 권위적 통치로 야권과 시민사회한테서 퇴진 압박을 받긴 했더라도, 현직 대통령이 사저에서 외국인 무장괴한에게 살해당한 건 씻을 수 없는 ‘국민적 상처’이기 때문이다. 범인들을 발견한 주민 일부는 그들을 밀치고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서까지 몰려가서 “저들을 우리에게 넘겨라. 우리가 불태워 죽이겠다”고 고함도 질렀다. 또 용의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차량엔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해당 차량엔 번호판이 없었고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고 한다.

아이티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정국 혼란 수습이다. 샤를 경찰청장은 “범행을 규명할 증거물이 필요하다”며 주민들에게 “침착함을 유지해 달라”고 촉구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도 “국민 여러분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다. 폐쇄됐던 국제공항도 다시 열었다. 9월 26일 대선과 총선 1차 투표를, 11월에 2차 투표를 치르겠다는 계획도 공표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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