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을 암살한 용의자들 중 6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중 2명은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AP통신에 따르면 아이티 경찰은 암살 사건 이틀째인 8일(현지시간)까지 용의자 6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은 기자회견에서 “범인 6명이 경찰 손에 있다”며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붙잡았고 배후 주동자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티 경찰은 전날에도 용의자 2명을 검거했다. 무장괴한들은 전날 새벽 1시 즈음 대통령 사저에 침입해 모이즈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당해 중태에 빠진 마르틴 모이즈 영부인은 미국으로 긴급 후송됐다.
AP통신은 마티아스 피에르 아이티 선거장관을 인용, 체포된 용의자들 중 2명은 아이티계 미국인이며 이중 1명은 제임스 솔라주라는 남성이라고 전했다. 솔라주는 과거 아이티 주재 캐나다대사관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설립된 자선단체에서도 활동했는데, 단체 웹사이트에서 자신을 ‘공인된 외교관’이라고 지칭하며 아이티 주재 캐나다대사관에서 경호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는 “용의자들 중 미국 시민권자가 포함돼 있다는 보도를 알고 있지만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들 두 용의자는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돼 경찰에 끌려갔다. 주민 일부는 이들을 밀치고 때리며 분노를 표했고, “저들을 불태우라”고 고함을 질렀다. 또 용의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버려진 차량 여러 대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차엔 번호판이 없었고 총알 자국이 가득했다. 샤를 경찰청장은 “범행을 밝힐 증거물이 필요하다”면서 주민들에게 “침착하라”고 촉구했다.
모이즈 대통령은 피살 당시 총알 12발을 맞은 것으로 파악됐다. 암살 사건 조사에 참여한 카를 앙리 데스탱 판사는 아이티 현지 일간 르누벨리스트에 “대통령의 시신에서 총알 자국 12개를 발견했다”며 “대구경 소총과 그보다 작은 9㎜ 총기의 흔적이 모두 있었다”고 밝혔다. 사저 안팎에서도 탄피가 다수 나왔다. 대통령 부부 외에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피습 당시 집에 있던 대통령의 딸은 오빠의 침실에 숨어 있었고, 가사도우미와 직원들은 괴한들에게 포박됐으나 공격을 받진 않았다. 사저 집무실과 침실은 모두 헤집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아직 암살 동기와 목적, 배후 세력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는 “고도로 훈련되고 중무장한 특공대가 투입된 것으로 본다”고 언급했다. 범인들은 ‘미국 소행’으로 비치도록 치밀하게 위장했다. 범행 현장을 촬영한 영상엔 소총으로 무장한 용의자들이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 행세를 하는 모습이 담겼다. 또 괴한 일부는 아이티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어 대신, 영어와 스페인어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DEA와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다.
바나나 수출업을 하다가 2015년 정계에 진출한 이른바 ‘바나나맨’ 모이즈 대통령은 2017년 2월 취임했는데, 임기 문제를 둘러싸고 야당과 줄곧 갈등을 빚었다. 야권은 올해 2월로 임기가 끝났다며 퇴진을 요구했으나, 그는 “부정선거 탓에 당선 1년 뒤에야 취임했다”며 내년까지 임기가 보장된다고 맞섰다. 급기야 지난 2월 7일엔 ‘나를 죽이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며 대법관 등 야권 인사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대통령 권한 강화를 위한 개헌도 추진했다.
모이즈 대통령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은 조제프 임시 총리가 맡기로 했다.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 전날 신경외과 의사 출신 아리엘 앙리를 새 총리로 지명했던 터라 누가 총리직을 이어갈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조제프 임시 총리는 국민들에게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일을 계속해 달라”며 혼돈에 빠진 정국 수습에 나섰다. 폐쇄됐던 국제공항도 다시 열었다. 또 9월 26일 대선과 총선 1차 투표를, 오는 11월 2차 투표를 치르겠다는 계획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