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플라스틱이 죽은 인간 행세를 한다면?

입력
2021.07.06 04:30
21면
최정화 '그레이트 퍼시픽 데드 바디 패치'
(현대문학 7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 드립니다.


1997년,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를 출발해 미국 서해안으로 향하던 선장 찰스 무어는 항해 도중 수면 위를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를 발견한다. 무어가 발견한 것은 훗날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 즉 GPGP(the Great Pacific Garbage Patch)라고 불리게 되는, 한반도의 7배 크기에 달하는 지구에서 가장 큰 쓰레기장의 일부였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흘러가 만들어진 이 쓰레기섬의 쓰레기 개수는 8,000억 개, 그중 99%가 플라스틱 쓰레기인 것으로 알려진다. 무어의 발견은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현대문학 7월호에 실린 최정화의 단편 ‘그레이트 퍼시픽 데드 바디 패치’(GPDP)는 바로 이 GPGP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환경 소설이다. 이 지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의 시체(Dead body)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소설에서 '찰리' 무어가 발견한 것은 쓰레기 대신 인간의 시체로 완전히 뒤덮인 섬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발견된 시체들 중 사망신고나 실종신고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시체들이 섬에 죽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육지에서는 무사히 학교에 등교하고, 회사에서 퇴근하고, 관공서에서 서류를 떼었으며, 슈퍼와 백화점에서 식량과 옷, 가전제품을 구입했다." 즉, 시체들 대신 가짜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거였다.

시체들 대신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블러’라는 로봇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을 돕는 이 일회용 로봇들이 살인을 저지른 뒤 시체를 섬에 유기하고 그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블러가 도처에 만연하게 된 이유는 하나다. “블러가 공짜이고, 사용하면 편리했기 때문"이다.


블러는 커피를 대신 들어주고, 빵을 대신 잘라주는 등 온갖 일을 해준다. 오로지 공짜라는 이유로 인간은 블러를 마구잡이로 만들어 사용했고 아직 새것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만 사용하고 버렸다. 인간이 할 일을 대신 해오던 블러는 마침내 인간의 존재를 대신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인간인지, 블러인지 알 수 없어서 주변의 가족과 연인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블러의 사용을 멈추지 못했다.

“버려진 블러들이 사람 행세를 하면서 이웃으로 살아 있다는 자각, 그들에게 생명을 잃은 가족과 연인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도 미미는 블러의 사용을 멈출 수 없었다. 블러를 사용하는 게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블러는 당연히 플라스틱에 대한 끔찍한 비유다. “편리함에 완전히 젖어 있었기 때문에 죽음조차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소설 속 문장은 작가가 굳이 상상력을 보탤 필요가 없는 문장이다. 2015년 한국의 1인당 플라스틱 원료 사용량은 세계 3번째(132.7kg)다. 한반도를 플라스틱에 내준 뒤 정작 우리는 시체들의 섬에 버려진다는 이 이야기가 결코 재밌는 우화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한소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