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m였다.
지난 5월 25일 오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원청 보광종합건설) 계단 벽면에 페인트칠 준비 작업을 하던 백영구(57)씨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나무 널빤지 높이가 그랬다. 널빤지를 딛고 계단 벽면을 평평하게 만들다가 추락한 백씨는 7개 남짓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혀 뇌출혈로 숨졌다.
백씨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건 사고 후 하루가 지나도록 누구도 그의 사고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그렇게 백씨는 출근 후 돌아오지 못했다. 백씨의 딸 미진(가명·36)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황당함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백씨는 매일 오후 6시에 어김없이 다섯 살 손자의 유치원 하원을 기다렸지만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미진씨는 "아버지 주변에 동료 작업자나 안전관리자만 있었다면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방치되다 보니 결국 사망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현장 안전관리자 부재는 백씨가 재해자로 기록된 보광종합건설 추락 사망사고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일보 탐사팀이 정의당 강은미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1년치 재해조사의견서 410건(지난해 6월~ 올해 5월)을 정밀 분석한 결과 백씨 사례처럼 사고로 인한 중대재해의 원인들을 한층 도드라지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터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는 결국 미설치·미작성·미배치, 그리고 미실시까지 '4미(未)'가 개별적이거나 복합적으로 작용한 인재였다. 안전 장비를 미설치하거나 미지급해 생긴 사고가 가장 많았고, 작업계획서가 없거나 부실하게 작성된 경우도 다수였다. 백영구씨 사고처럼 안전관리자를 미배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410건 가운데 43%는 2가지 이상의 세부 원인이 작용한 복합 재해로 드러났다.
한국일보는 '워드클라우드'(Word-cloud, 등장 빈도 높은 단어를 강조해 보여주는 데이터 시각화 기법)를 활용해 재해조사의견서에 기록된 ‘사고 원인’ 내용에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를 가려냈다. 각각의 의견서는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작성한 10페이지 안팎 분량이며, 의견서에 자주 등장한 단어일수록 크게 표기된다(이미지 참고).
410개 의견서 중에서 사고 원인과 관련해 100회 이상 언급된 키워드는 23개였다. 사고 현장의 안전 조치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단어가 가장 눈에 띄었다. 미설치(318회) 미착용(259회) 미작성(226회) 미실시(199회) 미지급(143회) 등이 대표적이다. 안전대(336회) 안전모(277회) 안전난간(150회) 등 현장의 안전을 담보하는 장비 이름도 다수 등장했다. 작업계획서(177회) 작업지휘자(114회) 등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하 안전보건규칙)에서 사업주가 지켜야 한다고 명시한 ‘안전 문서’ 작성과 ‘안전 인력’ 배치를 지칭한 키워드도 많이 언급됐다.
이 같은 키워드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중대재해에 영향을 준 원인은 크게 △안전문서 미작성 △안전인력 미배치 △안전장비 미설치(또는 미지급) △안전교육 미실시 등 크게 4가지로 나타났다. 본보는 이들 ‘4未’에 해당하는 항목을 추출해 사고 원인을 4가지로 분류한 뒤 세부적으로 9가지로 다시 나눴다.
분석 결과 사고 현장에서 안전장비를 미설치했거나 미지급한 경우가 224건(항목별 중복집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이 가운데 안전 난간 또는 작업 발판을 설치하지 않았거나 부실 설치해 발생한 사고가 74건으로 집계됐다.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 23조(안전조치)에 따라 안전보건규칙 13조에서 명시한 ‘안전난간 구조 및 설치요건’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안전대(로프)를 걸 설비를 달지 않거나, 설비가 있어도 쓸 수 없는 상태여서 생긴 사고도 56건에 달했다. 이는 안전보건규칙 43조(개구부 등의 방호조치)를 위반한 결과다. 사업주가 지급대장에 기록해야 하는 안전모와 안전대 등을 작업자에게 주지 않아 발생한 중대재해도 54건으로 나타났다.
안전보건규칙 38조에 따라 작성해야 하는 작업계획서가 없거나 산업안전보건법 36조가 정한 사업장 위험성 평가를 기록하지 않는 등 안전문서 부재(부실)로 일어난 사고도 86건으로 분석됐다.
이선호씨가 사망한 ㈜동방 평택지사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신호수(유도자) 부재, 작업 지휘자 또는 안전관리자 미배치 등 안전 인력이 없어서 일어난 사고도 68건으로 집계됐다. 백영구씨 사고 현장에선 안전관리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 출퇴근 명부도 없었다. 사고 당시 백씨 말고는 현장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고 사실을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재해조사의견서 410건에서 추출한 세부 사고 원인 9개 항목 중 2가지 이상의 원인이 작용해 발생한 중대재해도 177건에 달했다. 10건 중 4건이 넘는다.
무려 6개 원인이 겹쳐 사망 사고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8월 1일 경남 김해시에서 발생한 덕원종합건설 추락 사망 사고가 대표적이다. 일용직으로 작업 중이던 재해자는 철골 보조 설치 작업 중 10.9m 높이에서 떨어졌다. 사고 현장엔 안전대(로프) 부착 설비가 없었고, 안전대는 몸을 고정시킬 수 있는 안전고리가 없었다. 추락 방호망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작업계획서는 작성하지 않았고 작업지휘자도 없었다. 재해자는 특별안전 보건교육을 받지 못했다.
지난달 19일 발생한 효성중공업과 참존건설 깔림 사망 사고도 안전 장비와 작업지휘자가 없어 발생한 복합재해로 분류된다. 7년차 철근공 정모(49)씨는 경기 화성시 장지동 ‘동탄 물류센터’ 공사 현장에서 벽체 조성 작업 중, 12m짜리 철근 더미가 넘어지면서 깔려 사망했다.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철근 무게는 3톤 정도였다. 사고 순간을 유일하게 목격했다는 정씨 동료 작업자 A씨는 지난달 25일 사고 현장 입구에서 취재진과 만나 "본래 긴 철근 구조물을 조립해서 세우는 작업을 할 땐 쓰러짐 방지를 위한 버팀대로 쓰이는 비계를 대고 로프도 묶는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비계는 없었고 로프만 철근 양쪽에 4개씩 묶어놨다. 그게 다 터져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A씨를 비롯해 당일 현장에서 같이 일했던 작업자들은 "사고 장소에는 작업 지휘자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작업 순서가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계획서대로 작업하지 않았거나, 작업계획서 자체가 부실하게 쓰여졌단 의미다. 강한수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사고 이틀 후인 지난달 21일 현장을 방문했다. 강 위원장은 "높이 12m짜리 철근 작업이라 버틸 수 있는 비계를 먼저 세워야 했지만, 현장에선 비계도 없이 철근부터 세워놨다"며 "이런 순서로 작업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경기고용노동청 관계자도 "사고 결과만 놓고 보면 순서가 바뀐 채 작업이 진행돼 위험이 상존했다"며 "현재 하청업체의 작업계획서를 받아 계획대로 작업했는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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