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출마를 선언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단체발(發) 고소·고발 사건' 급증으로 수사기관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후보자 검증을 통한 진실 규명이란 긍정적 시각이 없지 않지만, 무분별한 고발로 수사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는 상대를 향한 '진흙탕 고발전'이 계속돼 민생 수사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엔 지난 29일 대선 출마를 공식화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집중 고발 대상이 되고 있다. 시민단체인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사세행)이 지난 2월 옵티머스자산운용 펀드사기 부실수사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고발장을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6월까지 11건의 고발장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한명숙 전 국무총리 수사팀의 위증교사' 사건에 대한 수사방해 의혹 등 2건은 공수처가 이미 수사에 착수했다.
윤 전 총장만이 아니다. 윤 전 총장과 함께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의혹 표적 감사' 의혹으로 공수처에 고발됐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윤 전 총장이나 최 전 원장처럼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면 10건 이상의 고발은 각오해야 한다"고 전했다.
현직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보수단체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전단 살포에 엄정한 법 집행을 주문한 것과 관련해 여적죄(적국과 합세해 한국에 맞서는 죄)로 고발하면서 '피의자 현직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권력감시 기능을 하는 시민단체 등이 고발을 통해 공익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 규명도 참여연대의 폭로와 고발로 시작됐다.
다만 대선 같은 굵직한 정치적 이벤트를 앞둔 시점엔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 유력 후보를 고발하는 경향이 뚜렷해, 통상의 고발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여기에 고위공직자 수사를 전담하는 공수처까지 생기면서 고발장은 더욱 쌓이고 있는 실정이다. 공수처의 경우 올해 1월 출범 후 6월까지 접수한 고소·고발 사건이 1,600여 건에 달한다. 매달 260여 건의 고소·고발장이 꾸준히 접수되고 있는 셈이다.
법조계에선 고발이 일상이 된 이유로 '비용 대비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언론 보도를 짜깁기한 수준의 고발장만으로도 얼마든지 수사기관에 접수가 가능하고, 고발 대상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사기관이 고발 사건을 모두 수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검찰과 경찰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언론 보도나 인터넷 게시글, 풍문 또는 추측만 근거로 한 경우 △수사 이익이 극히 적은 경우에는 수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부 규정을 두고 있다. 공수처는 분석조사 담당검사를 두고 입건 필요성을 사전에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에서 고발 사건을 각하하기는 쉽지 않다. 형사소송법에선 경찰로 하여금 고발 사건을 신속히 조사해 검찰에 송부하고, 검사는 사건을 수리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수사기관에 모든 고발 사건에 대해 입건 의무를 부여한 셈이다. 검찰 출신인 김종민 변호사는 "수사기관에서 고발 사건은 무조건 조사하는 게 관행처럼 인식돼 있다"며 "고발인의 반발을 우려해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도 조사를 안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입건되면 피고발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게 되다 보니 부작용도 적지 않다. 형사부 경험이 풍부한 한 검찰 관계자는 "고발 사건을 전부 입건해 처리하면 수사력이 낭비되는데다, 정치인을 겨냥한 고발이 많아지면 고발을 지렛대로 정치적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합리적 범위 안에서 수사기관에 재량권을 부여해 입건 여부를 결정토록 하는 선별 입건제를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다.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1차 수사종결권을 쥔 경찰이 선별 입건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고발할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되겠지만 오남용 문제도 만만치 않은 만큼, 합리적 대안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