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중에는 친구 오디션을 따라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본인이 됐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쩌면 이것도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것 같은 고전적 낚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감동적인 비주얼을 보면 충분히 납득되는 일이기도 하다.
비주얼의 1차 원인은 부모의 우월한 유전자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세기의 결혼 운운하는 분들의 자녀를 보면, 의외로 걸어 다니는 인형 같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외모보다 지능으로 가면, 부모에 의한 편차는 더욱 무뎌진다. 한국사를 통틀어 대를 이어 천재인 분은 ‘원효와 설총’이나 ‘김장생과 김집’ 정도가 고작이다. 율곡이나 다산의 자녀도 우리 같은 일반인의 군상을 벗어나지 못했지 않은가! 하기사 이분들 부모님도 크게 일반인을 넘어서는 분들은 아니었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라는 종의 평준화 노력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만일 부모가 천재인 것이 유전한다면, 몇 대만 천재끼리 결혼하면 슈퍼 천재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또 톱티어 연예인들이 대를 이어 결혼하면, 신급 미모가 완성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외모와 지능에서도 재벌과 같은 특수 계층이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태생적인 차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인류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생명은 신이 부여하는 고유권한이다. 이런 점에서 태생적인 우월성은 신의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신은 왜 평등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어렵다.
유교에서는 선천적인 차등을 조상의 음덕으로 이해했다. '주역' '문언전'에는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필히 남은 경사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조상의 음덕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인해, 명당과 제례 등의 조상숭배는 견고해진다. 즉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은 조상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후손이 잘되는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불교는 차등 문제를 전생으로 해석했다. 즉 부모에게 물려받은 능력을 넘어서는 부분은 지금과는 다른 생의 결과로 이해한 것이다. 불교는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차등은, 태어나기 이전의 원인에 따른 결과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제 → 오늘 → 내일’과 같은 사이클이 커지면, ‘어제는 전생 / 오늘은 현생 / 내일은 내생’이 된다. 이 때문에 붓다는 “너의 전생을 알고 싶다면 지금 네가 받는 현실을 보고, 너의 내생을 알고 싶다면 네가 지금 행하는 것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힌두교의 윤회론은 현생보다도 내생에 무게를 둔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현재의 삶보다도 사후의 천국에 초점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론은 철저하게 현재에 맞추어져 있다. 즉 부족한 나를 극기하고, 보다 나은 오늘을 이루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윤회론이 사용되는 것이다.
동양의 종교에는 재미있는 특질이 있다. 유교는 조상숭배를 강조하지만, 우리네 속담에는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것이 있다. 즉 조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불교의 윤회론도 비슷하다. 문제의 초점은 이미 지나간 전생이나, 아직 오지 않은 내생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서 윤회론은 실체적 진실이 아닌 수단일 뿐이다. 지금 나의 행복한 완성을 위한 수단, 불교의 윤회론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