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에서 조금 벗어난 옥천 안남면 산기슭에 국내 최대 규모의 메타세쿼이아 숲이 있다. 2013년부터 군청의 요청으로 무료 개방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진입로와 숲길을 정비하고 지난 4월부터 3,000원의 입장료를 받으며 본격 개방한 화인산림욕장이다.
‘화인(和人)’은 숲이 주는 효과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정홍용(78) 대표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숲에 들어가면 신선이 된다”고 했다. 숲에선 화가 절로 누그러지고, 응어리진 마음도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의미다. 여러 동식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숲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좋다(Fine)’는 뜻이다.
오로지 정 대표 홀로 47년간 가꿔온 숲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가구회사, 악기회사 등에 납품할 목재를 수입하던 정 대표가 고향마을의 산을 구입한 건 47년 전이었다. 묘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3개 동네에서 공동으로 보유한 산이었는데, 마을에 전기를 끌어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아야 할 형편에 놓였다. 구입하는 사람은 5년간 나무를 심고 풀을 베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 잘 가꾼 숲이 늘 부러웠다던 정 대표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때부터 메타세쿼이아, 전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와 산벚나무를 심었다. “단일 수종의 숲이 아니니 음식으로 치면 편식이 아니라 골고루 맛보는 산림욕장인 셈이지요.” 그래도 주종은 메타세쿼이아다. 처음에 3만여 그루를 심었는데, 여러 차례 간벌을 거쳐 현재 1만여 그루가 아름드리로 자라 빼곡하게 산자락을 뒤덮고 있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은 자취를 감추고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메타세쿼이아 그늘에 가려진 바닥은 수풀에 덮여 있다. 제주의 삼나무 숲이나, 남부지역의 이름난 편백나무 숲 못지않게 초록의 기운이 가득하다. 한낮에도 이른 아침이나 저녁같이 어둑어둑하다. 바람에 실려오는 짙은 풀 내음이 상큼하다.
메타세쿼이아와 편백나무가 섞인 구역을 지나면 산 정상으로 참나무와 벚나무, 리기다소나무와 일반 소나무 군락이 이어진다. 키 큰 소나무 사이에 군데군데 어린 삼나무가 자라는 모습이 보인다. 요즘 숲 가꾸기라는 명목으로 산을 벌거숭이로 싹쓸이 벌채하고 나무를 새로 심는 조림 방식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화인산림욕장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는 대신 조금씩 변해가는 방식을 택했다. 몇 십 년 후 이 숲이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예고편이다.
산 정상 부근까지 연결된 전체 산책로는 약 4km 순환코스다. 2시간가량 잡으면 여유롭게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이 숲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느긋하게 설계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이다. 산책로는 대체로 평탄하다. 가파른 구간은 지그재그로 연결해 힘이 들지 않는다. 이왕에 산림욕장이고 숲의 신선한 기운을 듬뿍 들이키는 게 목적이니, 서두를 것도 질러갈 일도 없다.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해도 기분 좋게 땀이 맺힐 정도다.
숲에는 목재 계단이나 벤치가 전혀 없다. 정 대표는 “방부 처리한 목재는 여러 환경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건강한 산림욕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 아예 배제했다”고 설명한다. 대신 5곳에 커다란 돌을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평상처럼 편안할 수 없으니 깔고 앉을 자리 하나쯤 가지고 가면 좋겠다. 주차장에 하나 있는 화장실이 다소 불편하다는 건 화인산림욕장의 유일한 흠이다.
매표소는 다른 직원 없이 정홍용 대표 부부가 번갈아 지킨다. 표를 사면 숲 안내도와 함께 입장료를 받게 된 이유를 적은 쪽지를 준다. 관리비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 적혀 있다. 평범한 야산을 명품 숲으로 가꿔 세상에 내놓았다는 자랑보다, 유료 전환한 데 대한 미안함이 행간에 배어 있다. “처음엔 친구들이나 불러 오붓하게 즐기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