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여가부)가 매년 진행하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조치 평가에서 공군본부가 지난해 8월 받아든, 훌륭한 성적표다. 피해자를 상담할 담당자도 지정돼 있었고 상담창구, 예방지침도 마련돼 있었다. 전문강사의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들은 연초 계획대로 빠짐없이 진행됐고, 고위직들도 교육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100점짜리 모범생 수준인 공군 성폭력 매뉴얼의 허상은 최근 부사관 성추행 피해 사망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이달 중순 진행된 현장점검의 결론은 '관련 규정과 매뉴얼은 있었지만, 사실상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여서다. 매뉴얼 점검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인지 보여주는 셈이다.
29일 여가부 등에 따르면 양성평등기본법과 성폭력방지법은 국가기관이 연간 기본 계획과 교육 방법, 실시 여부 등 성희롱·성폭력 예방 조치와 관련된 매뉴얼을 매년 여가부에 제출하도록 해뒀다. 1년간 이행 내용을 기록해 여가부 시스템에 등록하면 여가부가 문제가 있는지 들여다보는 구조다. 보통 등록 기한은 2월, 점검 결과 발표는 8월 말이다.
문제는 점검 내용이 상당히 피상적인 데 있다. 고충 상담원 지정, 상담창구 설치, 계획 수립에다 동그라미만 그려넣으면 사실상 통과다. 2020년 점검 결과 때 공군본부는 우수한 성적으로 보였다. 종사자, 그리고 고위직의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참여율은 각각 99%, 100%를 기록, 공공기관 전체 평균(종사자 90%·고위직 91%)보다 훨씬 높았다. 교육 참여율로만 따지면 100점짜리 공군본부였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뒤 진행된 여가부의 현장점검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기본적 조치 규정도 부실해 관사에서 마주치는 걸 막지 못했고, 재발방지대책을 단순 교육이나 워크숍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안일한 인식에, 교육은 구체적인 사례가 빠진 얘기를 수백 명이 떼로 듣는 일방적 강의 형식이었다. 관리자에게 숙지시켜야 하는 2차 피해 방지 체크리스트도 없었다.
결국 현재로선 비극적 사건이 터지고서야 여가부가 현장 점검 나가보는 것 외엔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매뉴얼 뼈대만 만드는 게 아니라 세부적 지침을 일일이 확인해 현장에 엄격하게 적용하는 문제는 각 기관별 의지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제 치부를 스스로 밝힐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란 지적이 나온다.
여가부는 그간 개입 권한을 높이기 위해 애써 왔다.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양성평등기본법·성폭력방지법 개정안에 따르면, 이제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기관은 그 즉시 의무적으로 여가부에 사건을 통보해야 하고, 사건이 중대할 경우 여가부는 현장점검, 시정이나 보완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여가부의 시정이나 보완 요구는 '권고'에 그치기 때문이다. 해당 기관이 안 따르면 그만이다. 여가부 장관이 직접 시정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을 때엔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담긴 성차별·성희롱금지 및 권리구제법(가칭) 제정 문제는 여전히 진척이 더딘 상황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더해 여가부가 직접 시정명령과 과태료 부과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준비 중인 단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