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지고, 빨라졌다. 미국에 대응하는 북한의 메시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제정세 변화에도 침묵을 유지하다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입장을 내놓던 과거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원색적 비난도, 장광설도 사라졌다. 대신 핵심적인 몇 문장으로 ‘치고 빠지는’ 기민함이 두드러진다. 22, 23일 잇따라 발표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리선권 외무상 담화 얘기다.
미국의 ‘입’이 발단이 됐다. 20일(현지시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21일 성 김 대북특별대표는 ‘대화와 대결’을 둘 다 언급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의 대외 정책 구상에 대해 “흥미로운 신호” “조건없는 대화” 등으로 답했다. 김 부부장은 곧장 이튿날(22일) “꿈보다 해몽”이라고 응수했고, 리 외무상도 23일 “무의미한 미국과의 접촉과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엄포를 놨다.
북한의 연이은 반응은 이례적이다. 올해 3월 나온 김 부부장의 첫 대미 담화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 3개월 만에 나왔다. 메시지 분량도 확 줄었다. 지난해 7월 김 부부장이 낸 대미 담화는 A4용지 4장 정도, 3,400여 자에 달했다. 반면 최근 두 개의 담화는 각각 ‘넉 줄, ‘두 줄’로 짧았다. 수위 역시 한층 점잖아졌다. “쓰레기 같은 볼턴(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과격한 언사로 미국을 자극하지 않았다.
북한의 ‘신속ㆍ간결’한 담화에는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짦은 문장으로 해석의 여지를 넓혔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 행동에 나서지 않는 미국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다. 북한은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등 대화에 앞서 미국의 양보를 반드시 얻어내야 해 ‘기싸움’에서 밀릴 수 없는 상황이다. 실용 외교로 포장해 대화와 압박이란 상반된 전략을 펴는 바이든 행정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절제된 메시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24일 T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북한의 담화는 (미국과) 처음부터 본격적인 협상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라며 “시쳇말로 미국과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도 북한의 노림수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침묵보다는 비난이라도 반응을 하는 게 낫다고 여기고 있다. 백악관과 국무부 관계자는 23일 미국의소리(VOA)방송에 “우리 입장은 변함없다”면서도 “북한이 우리의 대화 제의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란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일각에선 미국이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있는 만큼 또 다른 최고위급 담화가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이 시의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최선희 외무상 1부장 등 명의의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다”라며 “분량은 짧아도 파급력은 강하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