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공정이라는 유령에 홀려 있다. 박성민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21일 청와대 청년비서관에 임명된 후 “나는 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나” “노력 없이 출세하는구나” 같은 반응이 익명으로 보도된다. 대학생, 보좌관이 모인 인터넷 사이트들이 출처다. 국민의힘 보좌진협의회는 22일 성명서까지 냈다. “일반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석·박사를 취득하더라도 취업의 문을 넘기 어렵다. 몇 년을 준비해서 행정고시를 패스해 5급을 달고 근 30년을 근무해도 2급이 될까 말까 한 경우가 허다하다”고 비판했다. 요점은 박 비서관 발탁이 ‘불공정’해 다른 청년들에게 박탈감을 준다는 것이다.
보좌관도 행시를 안 치고 4급 공무원이 되는데 연륜이 있어 괜찮다는 걸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에 대해선 “10년간 굴러 선출됐다”며 옹호하는데 비슷한 나이에 그가 누린 (최고위원 발탁) 기회를 박 비서관에겐 주면 안 되나. 애초에 정무직과 무관한 행시는 왜 따지며, 민주당 청년대변인에 선발될 수 있었던 그의 실력은 왜 무시할까.
이 낯익은 공정 개념은 아무리 봐도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자격대로 순위를 매겨 차등 보상하자는 줄세우기에 가깝다. 따지는 자격이 업무 능력인 것도 아니다. 대학 순위, 시험, 성적이 ‘정당한’ 자격으로 인정된다. 그 외 관문을 통과하면 ‘새치기’로 간주된다. 줄 뒤에 있어야 할 이가 나와 동등한 보상을 받는 것은 ‘불공정’이며 나의 자격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니 콜센터 직원 직고용을 반대하는 건보공단 직원들은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정규직 전환은 ‘공정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라고 한다. “시험 안 친 콜센터 직원들이 건보공단 직원이 되겠다는 것은 건보공단 직원이 보건복지부 공무원 시켜달라고 떼쓰는 것과 같다”는 댓글도 있다. 인천국제공항 사태 때 정규직 전환이 신규 채용에 큰 영향이 없는데도 공시생들은 "배신"이라며 분노했다. 박 비서관이 강남대에서 고려대로 편입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학력 자격에 대한 시비다. 고려대에서는 분교 캠퍼스 학생이 본교 캠퍼스 총학생회 임원이 되자 “고대생 흉내 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같은 캠퍼스에서조차 지역균형선발전형 합격자를 무시한다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학력주의와 합격주의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뒤틀린 공정이다.
20대라고 다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공정하냐”는 항의는 커지고 있다. 기득권층이 인맥과 학맥을 이용해 철옹성을 구축한 것에 비하면 시험으로 자격을 입증하는 게 더 공정하다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유독 청년 취업과 관련해 공정 담론이 거센 것을 보면, 문제의 핵심은 좋은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있다. 양질의 일자리와 다른 일자리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자산 전쟁마저 불붙은 상황에서 팍팍한 경쟁의식이 확산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가 왜곡된 인식 그대로의 ‘공정 경쟁’을 내세워서는 청년들을 구할 수 없다. 줄 뒤쪽 빈곤·저학력 청년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대나무 숲에 쏟아낸 한탄을 기사화하는 언론도 공론장의 역할을 방기한 것이다. 정치가 천착해야 할 과제는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없애거나 양질의 일자리를 양산하기는 어렵지만 소득과 자산의 격차를 줄이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세제와 복지, 산업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25세 청년이 언제든 1급 비서관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수능에 실패해도 대학에 진학할 경로가 있기를 바란다. 지방대·고졸 출신도 존중받으며 일하는 환경을 꿈꾼다. 그때에 공정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정규직화 반대, 할당제 폐지, 박성민 논란은 뒤틀린 공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