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잘 못해도 계속해야 해... 세상을 만나기 위해선

입력
2021.06.26 10:00
19면
<42> 넷플릭스 '스케이터 걸'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스케이트보드가 배우고 싶어진 건 서른도 훌쩍 넘었을 때였다. 한 달이 넘는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공원을 찾았고, 공원 어디에서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대충 소년이라고 부르면 포함될 법한 사람들이었다. 길을 가다 보면 스케이트보드를 이동의 도구로 삼아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볼 수 있었는데, 판자 아래 바퀴가 달린 가장 단순한 구조의 탈 것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게 멋져 보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스케이트보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국의 일상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을 보기는 어려웠고, 보이지 않으면 잊기도 쉬웠다. 그리고 2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여성을 위한 스케이트보드 일일 강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구들에게 "우리 나이에 넘어지면 뼈 안 붙는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스케이트보드를 배우러 갔다. 운동 신경이 평균보다 부족한 편이기는 하지만 겁이 없어서 무엇이든 시작을 잘하는 나의 운동 패턴이 스케이트보드를 배울 때도 도움이 됐다. 보드 위에 서는 법과 주행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바로 혼자서 연습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연습을 위해서는 내 소유의 보드가 필요하다. 몇 주를 고민하다가 보드를 샀다. 나만의 자전거도 가진 적이 없는 내가 소유한, 첫 번째 '바퀴 달린 탈 것'이었다.

지난 11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인도 영화 '스케이터 걸' 역시 처음으로 스케이트보드를 만난 인도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는 널빤지에 바퀴를 달아 만든 조악한 나무 썰매에 동생 안쿠쉬(샤핀 파텔)를 태우고 흙먼지 가득한 길을 달리는 소녀를 비추며 시작한다. 인도 북부 라자스탄 지역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이 소녀의 이름은 프레르나(레이철 산치타 굽타)이다. 이 이름에는 인도어로 감동(感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에서 이미 프레르나가 영화의 끝에 모두에게 감동을 주게 될 것은 충분히 예상이 되지만, 시작 지점의 소녀는 남동생과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일만 돕고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중시하는 아버지가 마지못해 학교를 다시 보내줬지만 입고 갈 교복이 없어 손수 옷감을 염색해야 하고, 물 한 병 가격이면 살 수 있는 교과서조차 없다. 인도로 여행 온 런던 출신의 제시카(에이미 마게라)가 우연히 프레르나와 동네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케이터 걸'을 보면서 또 다른 인도 영화인 '당갈' 생각이 났다. 소녀가 스포츠를 통해서 세상을 만나고, 가부장제와 계급이 공고한 인도 사회에서 편견과 맞서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두 영화를 연결 짓게 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당갈'은 여성 레슬링 선수의 이야기다. 인도의 작은 동네에서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고 승리의 역사를 쌓아간 주인공은, 결국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가 되는 꿈을 이룬다.

'당갈'은 승리의 쾌감과 경쟁의 재미, 가족애가 살아있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스케이터 걸'은 조금 다른 길을 간다. 운동할 때 이기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를 중시하는 '당갈'과 달리, '스케이터 걸'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는 것의 의미에 집중한다. 이는 레슬링과 스케이트보드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상대가 있어야 하는 레슬링과는 달리, 스케이트보드는 혼자 기술을 보여주는 스포츠다. 스포츠의 영역에 다다르기 이전이라면, 스케이트보드는 놀이에 더 가깝다. '스케이터 걸' 속의 인도 아이들 역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일을 놀이로 즐긴다. 이 놀이가 인도의 시골에서 여자로 사는 무게를 짊어진 말수가 적은 소녀의 세계를 어떻게 바꿀까? 영화는 여기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프레르나의 재능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스케이터 걸'은 프레르나가 스케이트보드를 뛰어나게 잘 타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프레르나는 그저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할 뿐이다. 스케이트보드가 처음으로 그에게 '나는 기분'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여전히 카스트 제도 아래의 계급을 따지고, 여자의 일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 세계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스케이트보드가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프레르나의 시도도, 스케이트보드도 핍박을 당한다. 비행을 일삼는 위험한 청소년 문화 정도로 폄하되고 어디서나 쉽게 금지당하는 스케이트보드와 세상을 배우고 알고 원하는 것을 찾아갈 시도 자체를 차단당하는 프레르나의 운명은 겹쳐진다. 마을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 스케이트보드와 아버지의 억압 속에 알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할 위기에 놓인 프레르나를 구하는 건 또 다른 여자들이다.

제시카는 스케이트보드 전용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마을의 유지인 노년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남자 권력자들은 이미 거절한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 여자애들에게 기회를 주나요?" 여기서 기회는 챔피언이 되는 것이나 세상에 나가 재능을 펼쳐 보이는 것 이전에, 세상과 만날 기회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일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을 해야 하는 곳인 가정에 갇히지 않고, 그게 무엇이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에 살 기회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미래 세대의 소녀들이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을을 바꾸는 데 기여한다.


프레르나를 끝까지 두렵게 만든 스케이트보드 기술의 이름은 '드롭 인'이다. 성별을 불문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든 사람이 첫 시도 때 겁내고 어려워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스케이트보드의 뒷부분을 대고 있는 바닥과 아래쪽 곡선의 길이 계단처럼 꺾여있는 구조물에서 내려가는 기술이다. 한 발은 보드의 뒷부분을 밟고 또 다른 발로는 앞부분을 누르며 무게 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보드의 뒤쪽 5분의 1만 바닥과 닿아있고 뒷바퀴부터는 허공에 떠 있기 때문에 보드와 함께 아래쪽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드롭 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

알지 못하기에 허공처럼 보이는 어딘가로 뛰어드는 일은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다. 같은 동작을 시도하다 이미 한 번 부상을 당했기에 더욱더 무서울 것이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드롭 인을 어떻게 했는지 프레르나가 묻자, 동생 안쿠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서웠지. 그래도 했어." 프레르나는 무섭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세계를 박차고 나가 사람들 앞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드롭 인을 성공시킨다. 영화는 프레르나에게 1등을 주는 대신 특별상을 준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태도다. 재능이나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얼마나 끈기 있게 계속 시도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무섭지만 그래도 하는 것. 소녀들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기회를 줄 때, 모든 것을 시도하고 선택할 자유를 줄 때, 내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프레르나의 운명이 스케이트보드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소녀에게 자유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스케이트보드를 산 뒤로 일주일에 두세 번 집 근처 체육센터 운동장에 나가 연습을 했다. 즐거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질 때 팔을 잘못 짚어 오른쪽 팔꿈치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한 번 다치고 나서 알게 된 건, 서른이 넘은 사람이 스케이트보드를 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직 충분히 운동에 숙련되지 않은 사람에게 보호장비는 필수라는 게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한 번쯤은 넘어지게 되어있다는 것도 알았다. 넘어지고 나서야 배우는 것이 있다. 넘어져도 잘 못해도 계속하기만 한다면, 잘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할 줄 아는 내가 된다는 것을 나는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배웠다.

요새는 공원에 가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여자 어린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팬데믹 시기에 몇 번 세상 빛을 보지 못한 보드를 타고, 앞으로 쭉쭉 밀고 나가는 느낌을 느끼고 싶다. 프레르나는 그 느낌을 '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면 나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실제로 나아간다.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데로. 프레르나와 인도의 소녀들이, 세계의 모든 소녀가 그렇게 계속 간다면 좋겠다.

윤이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