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한국군 위안부'... 국가는 70년간 외면하고 있다

입력
2021.06.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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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 최초 연구 김귀옥 교수]
2002년 논문 발표해 군 위안부 동원 드러내
군 자료에도 명시… 서울·강릉 전선에만 128명 
성매매 오해, 왜곡된 성의식에 피해 증언 전무
"유엔 안보리 인정한 범죄… 국가가 책임져야"

6·25전쟁 때도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19년 전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김귀옥(59) 한성대 교수의 2002년 논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6·25전쟁 71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한국군 위안부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와는 또 다른 차원의 억압과 편견에 눌려 피해 증언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김 교수는 2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와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군 자료에도 기록된 '위안부'

6·25전쟁 중 한국군 위안부가 동원된 시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1951년 가을쯤 전쟁이 소강상태를 맞아 전선이 현재 휴전선 부근으로 고착됐을 때 군인 관리를 명목으로 위안부가 도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이다. 다만 위안부 운영 사실은 여러 사료로 입증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예컨대 1952년 12월 30일 자 동아일보엔 '한국군을 위한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실렸고, 이듬해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1월 16일 자 경향신문엔 '육군회관 4개에 걸쳐 한국군 위안소를 증설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군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 교수는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에서 전쟁 중 후방 지원 업무 명목으로 '특수위안대'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이 책엔 위안부를 '소대'로 편제해 운영한 기록 일부가 남아있는데, 이를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에만 128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김 교수는 "최근 강원 고성·양양 등에서 위안부가 동원된 흔적이 추가로 발견됐다"며 "공식적 운영뿐 아니라 각 부대가 자체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전 장교나 포로가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한 기록도 적지 않다. 김 교수가 1996년 11월 강원 속초에서 인터뷰한 월남민은 한국군에 민간인 포로로 잡혔을 때 위안부를 봤다고 회고했다. 그는 "군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 이북 말씨를 안 썼고 군인들을 위문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채명신・차규헌・김희오 장군의 회고록에도 국군을 위한 위안부가 배정됐다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성매매 오해・민족주의… 피해 증언 어려워

여성을 전쟁에 성노예로 동원한 반인륜 행위라는 점에서, 한국군 위안부는 절로 일본군 위안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둘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 중엔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도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2명의 피해자를 만났지만, 이들은 존재를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피해 사실 진술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당시 국권을 침탈한 일본을 가해자로 지목할 수 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민족으로 묶여 있어 피해를 증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만났던 여성은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피해 직전 군인의 호의로 풀려난 후 그와 결혼했다고 진술했다. 실제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중 상당수는 이런 '강제 결혼'을 통해 피해 사실이 없던 일처럼 돼버렸다고 한다.

민간에서 성매매 여성을 모집해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주장도 피해자를 숨게 만든다. 김 교수는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위안부가 공개 모집 형태로 운영됐다는 증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피해 여성들이 전방 지역으로 '강제 출장'을 갔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조직적 통제 정황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는 당시 육군본부 기획에 따라 제도화돼 국가 체제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성 중심적 성 인식이 위안부 문제 조명을 막는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전시 상황이던 당시엔 군인의 성욕이 억눌린 상태이므로 민간인 대상 성폭력을 막기 위해서라도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전후에도 피해 당사자들이 나설 수 없는 환경이었고, 위안부 존재를 증언한 일부 남성들 역시 피해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을 드러냈을 뿐 이를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70년간 함구… "국가가 책임져야"

김 교수는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역사를 숨기려 한다는 걸 여러 번 체감했다고 한다. 2002년 논문이 발표된 후 국방부는 당시 김 교수가 소속된 학교 측에 연락해 연구 자제를 요구하는 등 외압을 가했다. 위안부 존재를 입증할 결정적 기록물인 '후방전사'는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2005~2010년 활동한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6·25전쟁 당시 벌어진 국가 폭력 사건을 여럿 조사했지만 정작 한국군 위안부는 다루지 않았다. 김 교수는 "지난해 청와대에서 한국군 위안부 진상 규명에 관심을 보이며 연락을 해왔지만 그뿐, 실제 노력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가 엄연한 국가적 범죄이며 국제적 책임 역시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000년 만장일치로 채택한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결의안'에 따르면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국가가 진상규명・사과・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며 "한국도 이 결의안에 서명한 국가이자 가해 주체로서 한국군 위안부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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