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딸 살해한 78세 아버지..."손주 인생에 해 될까 봐"

입력
2021.06.20 10:00
범행 미리 계획…야산에 구덩이 파 
부인과 시신 옮기다 실패, 112 신고 
경찰, 목 졸린 흔적 발견해 추궁하자 
"손주 앞날 걱정돼 그랬다" 자백

지난 4월 경북 포항에서 조현병을 앓던 40대 딸을 살해한 70대 아버지가 재판을 받게 되면서 범행 동기 등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있다. 구속된 아버지는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딸의 증세가 악화해 딸이 낳은 어린 손주의 앞날이 걱정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19일 대구지검 포항지청과 포항북부경찰서 등에 따르면 A(78)씨는 지난 4월 20일 대낮에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40대 딸을 살해했다. 그는 미리 준비한 노끈으로 딸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뒤 마대에 담았다. 딸의 사체를 숨기는 데 어머니인 A씨의 부인도 거들었다. 노부부는 집 근처 야산에 딸의 시신을 묻기 위해 큰 구덩이를 팠지만, 옮기는 일이 쉽지 않자 장의사를 불렀다.

A씨 부부는 장의사에게 "자고 일어나니 딸이 죽었다"며 매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장의사는 "집에서 병으로 죽어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며 절차를 알려준 뒤 돌아갔다.

A씨는 장의사의 말대로 다음 날 오전 8시쯤 112신고로 딸의 사망을 알리면서도 "자고 일어나니 딸이 죽어 있었다"며 범행을 숨겼다. 그러나 경찰은 목 졸린 흔적을 발견하고 A씨를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다.

A씨는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조현병을 앓던 딸의 증세가 점점 악화됐고, 딸이 낳은 손주의 앞날이 걱정돼 살해했다"며 "나이가 많은 나와 아내가 먼저 죽으면 딸이 손주 인생에 해가 될 것 같아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조현병은 뇌 신경세포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신경정신질환의 일종으로, 환자는 피해망상과 환청이나 환각, 행동이상 등을 나타낸다. A씨의 딸은 지난 2013년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약 5년 전 자신의 아이와 함께 친정에 들어와 함께 산 것으로 전해졌다.

정신과 전문의 등은 A씨가 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 어려워 일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017년 조현병 환자의 입원과 관련한 정신보건복지법이 개정, 환자 본인의 동의 여부가 중요해지면서 강제입원이 한층 까다로워졌다. 2019년 4월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에게 흉기를 휘둘러 22명의 사상자를 낸 안인득은 중증의 조현병 환자였다. 사건 이전부터 자주 타인에게 해를 끼쳐 그의 친형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지만, 인권문제 등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영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이사(전 국립부곡병원장)는 "가족이 있는 조현병 환자의 강제입원이 까다로워지면서 환자 가족들의 고통과 부담이 커졌다"며 "조현병 딸을 살해한 노부와 그 일을 사실상 도운 노모 역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이런 일을 저지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포항= 김정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