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을 버텼던 전신화상 청년이 떠나던 날, 우리는 함께 울었다

입력
2021.06.29 17:00
25면
<18> 이동환 가정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 새로 오신 인턴 선생님이군요! 안녕하세요?”

짧은 머리에 구릿빛 얼굴, 단단한 체구, 불끈 튀어나온 이두박근이 눈에 띄는 젊은 남자가 병실 앞에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내가 마주 인사하며 병실로 들어서자 그도 따라 들어왔다. 한순간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상에 누운 환자의 모습이 보였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1인실에 홀로 누운 전신화상 환자를 두 눈으로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성한 피부가 한 조각도 남지 않은 얼굴은 울퉁불퉁 붉은 살덩어리 같고, 하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돌출된 상태였다. 몸통과 팔다리가 붕대로 칭칭 감긴 채 거칠게 호흡하는 환자의 모습은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 환자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에게 인사했던 청년이 환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 새로운 인턴 선생님이 오셨어요. 앞으로 형 치료를 맡아주실 거예요.”

“선생…니임…. 잘 부탁…드려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환자는 서른 살의 남자였다. 사고가 난 것은 벌써 한 달 전, 가스 폭발이었다. 팬티 자국만 빼고 전신 90% 화상을 입은 환자의 사망 확률은 90%였다. 그는 10%의 아슬아슬한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었다.

1991년의 무더웠던 7월 말, 외과 병동의 거의 모든 방은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환자의 방만은 예외였다. 전신 화상으로 피부를 죄다 잃은 환자는 삼복더위에서도 추위에 떨었다.

첫 만남이 있던 날 오후 2시. 병실에서는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매일 한 번씩 화상 드레싱을 하는 시간이었다. 간호사 두 명과 나를 포함한 의사 두 명 그리고 환자의 동생, 이렇게 다섯 명은 수술 가운과 장갑 그리고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다. 푹푹 찌는 병실 안에서 그런 차림으로 선 우리의 등줄기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우리는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로 환자를 옮겨서 붕대를 물에 불리며 조심스레 떼어내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살에 달라붙었던 붕대를 떼어낼 때마다 환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벌써 한 달이나 형의 치료를 도와온 동생은 웬만한 의사만큼 능숙했다. 그는 드레싱을 하는 동안 형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 계속 속삭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모든 작업을 끝내고 병실에서 나온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꼬박 두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 환자를 치료하는 일 말고도 당시 외과 인턴에게 주어진 일들은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두세 시간, 밥 먹을 시간에 차라리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매일 오후 화상 치료를 하면서 그 형제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환자는 사고를 당하기 전 음악을 유독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지나가던 어느 날, 희망의 싹이 움트는 게 보였다. 환자 아랫배 쪽에 새로운 피부가 돋아난 것이다. 회진을 돌던 담당 전문의 선생님은 성형외과에 의뢰해 피부 이식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다. 나와 동생은 서로의 눈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2주가 지났다. 여느 때처럼 밤 11시에 다음 날 회진 준비를 하는데 삐삐가 울렸다. 외과 병동이었다. 전화를 해보니 그 환자에게 고열이 있다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항생제를 두 차례나 바꾸었지만, 환자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그리고 며칠 후 늦은 밤. 환자의 의식이 혼미하다는 다급한 목소리에 병실로 달려갔다. 당직 전공의 선생님이 인투베이션(기도삽관)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동생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 환자 머리맡에 서서 앰부(수동식 인공호흡펌프)를 잡고 있었다. 자가 호흡은 이미 사라졌고, 그는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숨을 쉬었다. 두 손으로 앰부백을 누르면 그의 가슴은 숨을 들이쉬며 부풀었다가 손을 놓으면 다시 가라앉았다. 그렇게 그는 이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돌덩이 같은 고통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다른 인턴에게 펌프를 맡긴 후 잠시 병실을 나왔다. 볼일을 본 뒤 병실로 돌아가려는데 동생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 잠시 숨 돌리면서 담배 한 대 피우시죠.”

동생과 나는 흡연구역으로 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착한 보호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아니 내 안의 슬픔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허둥댔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어리둥절한 눈길로 나는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동안 선생님이 너무 고생하셨는데, 우리 형이 견디지 못하고 가려나 봐요. 그렇게 애쓰신 보람도 없이요. 형이 끝까지 버텼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죄송해요.”

그 순간 누구보다 힘겨웠을 그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만 흘렸다. 옆에 선 그도 울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문득문득 그 밤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느꼈던 절망감, 서서히 호흡이 잦아들던 환자의 표정, 그리고 가장 힘들고 슬픈 순간에 오히려 나를 위로하던 낮은 목소리. 30년이나 흐른 지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사려 깊던 그 청년은 분명 단단하고 향기로운 삶을 일구어냈을 거라 믿는다. 아픈 형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진정한 사랑과 배려가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주었던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여전히 가슴 한쪽이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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