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대화 재개 손짓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가 입을 열었다.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돼 있어야 한다"면서다. 1월 8차 당대회에서 밝힌 '강(强) 대 강(强), 선(善) 대 선(善)'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외교적 해법을 강조한 미국이 명분을 제시하면 대화에 응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19일 방한하는 성 김 미 대북특별대표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유인하기 위한 메시지를 발신할지도 관심사다.
18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전원회의 셋째 날인 17일 "국가 존엄과 자주적인 발전 이익을 수호하고 평화적 환경과 국가 안전을 믿음직하게 담보하려면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 이후 공식적으로 밝힌 김 위원장의 첫 대외 메시지다. "대결에는 더욱 빈틈없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화 환경 조성을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이 많다. 1월 8차 당대회에서 미국을 '최대의 주적'으로 칭한 것에 비해서도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다.
북한의 태도는 현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의도가 짙게 반영돼 있다. 김 위원장은 "시시각각 변화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조선반도(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당장 판을 깨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겠다는 뜻이다. '대결 준비'를 언급한 것은 북한의 '자주 국방'에 대한 원론적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든 대결 국면으로 전환할 여지를 남긴 것이기도 하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YTN에 출연해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사견임을 전제로 "대화에 방점이 찍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대결은 넣은 것은 대화 테이블이 마련됐을 때 더 유리한 입장을 갖기 위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지난달 한미정상회담 이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고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의 이날 발언으로 공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간 모양새다.
당장 성 김 대표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성 김 대표의 대북 접촉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 등 북한이 '적대시 정책'으로 여기는 사안에 논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온건한 원칙론'을 제시하며 미국에 대화의 기회를 줬다"며 "북한이 대화에 응할 수 있을 만한 명분을 적극적으로 깔아주기만 하면 협상 테이블 앞에 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북한이 얼마나 신속하게 대화에 나설지가 불투명하고, 경우에 따라 분위기가 급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적대시 정책 철회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면 북한은 당분간 '정면 돌파'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어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유지할 경우 북한은 핵을 통해 미국을 계속 압박할 것이고, 긴장이 고조될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에선 8월 한미훈련 진행 여부를 주시할 수도 있다.
북한 내부 상황도 변수다. 김 위원장이 전원회의 첫째 날인 15일 '식량난'을 공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경제 사정은 어렵다. '체제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대외문제에 무게중심을 이동하기에 앞서 내부 단속에 주력해야 한다. 김 위원장이 17일 "국가 부담으로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젖제품(유제품)을 공급하는 것을 당의 정책으로 수립하겠다"며 육아 정책을 강조한 것도 민심을 다지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