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참외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는 경북 성주. 대표적 여름 과일인 참외 출하로 요즘 한창 바쁠 때지만, 최근엔 그보다 더 시끌벅적한 곳은 청포도 일종인 샤인머스캣 출하장이다. 성주에서 30년 동안 참외 농사를 지은 김지웅(50)씨는 "작년 말만 해도 23곳에 불과하던 샤인머스캣 재배 농가가 6개월 사이 꾸준히 증가해 최근엔 100여 곳이나 됐다"며 “재배 작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 식재 뒤 3년이면 열매가 열리는 만큼, 몇 년 뒤 이들 농가에서 샤인머스캣 출하가 본격화할 경우 ‘참외 주산지’ 타이틀은 바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씨의 샤인머스캣 생산량(매출기준)은 그 농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올해 참외를 추월했다.
성주 참외, 제주 감귤, 청송 사과, 나주 배처럼 각 작물 이름 앞에 주산지명이 붙어 하나의 단어처럼 통용되는 각 지역의 주요 작물이 바뀌고 있다. 이상 기후 탓이란 말도 있었고, 소득 증가에 따른 소비자들의 입맛 변화, 그에 따른 시세 격차 등이 영향을 미쳐왔지만, 최근 이 같은 변화 배경엔 농촌의 고령화가 꼽힌다. 재배와 수확에 허리를 많이 숙여야 하는, 이른바 ‘포복(匍匐) 재배’ 기피 현상에 따른 것이다.
실제 샤인머스캣 재배 면적이 빠르게 늘고 있는 참외의 본고장 성주는 대표적인 고령화 지역이다. 고령화로 일찌감치 소멸위험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지난해 기준 성주 농업인구 1만5,801명 중 60세 이상은 1만359명으로 3분의 2에 달한다. 성주군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20일 "참외도 소득 측면에선 충분히 유리한 작목이지만, 농민들 대부분이 연령대가 높다 보니 몸에 무리가 덜 가는 품종으로 전환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샤인머스캣 재배와 수확에 무릎, 허리를 굽히는 일이 참외에 비해 훨씬 적고, 노인들이 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국인 인력마저 구하기 어려워진 농촌 현실도 이 같은 작목 전환을 부추겼다”고 말했다.
여름철 대표 과일인 수박도 ‘포복 재배 과일’의 대명사. 특히 한 통에 기본 3~4kg씩 하는 수박의 주산지 작목도 양파 등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수박의 고장’으로 유명한 경북 고령이 대표적인 예다. 고령은 가야산 맑은 물과 낙동강변 사질 토양의 비옥한 땅 덕분에 아삭한 육질과 높은 당도의 수박을 생산, 전국구 명성을 떨치는 곳이다.
고령군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지역 수박 재배 규모는 최근 5년 사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2015년 509개 농가(419㏊)에서 올해 273개 농가(198㏊)로 급감했다. 반면, 10년 전체 재배 면적이 100㏊가 안 됐던 양파는 올해 542㏊로 5배 이상 늘었다. 이에 힘입어 고령은 경북 내 23개 시ㆍ군 중 ‘양파 재배면적 1위 지자체’로 등극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인구 3만 남짓한 고령군의 60세 이상 인구 비율은 2011년 29%에서 올해 5월 44%로 급등했다.
동고령농협 관계자는 "수박은 무더운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일이 손으로 허리를 숙여 일해야 한다"며 "양파 농사도 힘들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덜 요구돼 지역 농민들이 품목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수박이 지역 특산품인 경남 창원 대산면도 고령과 비슷한 상황이다. 대산농협 경제사업소에 따르면 2016년 180ha에 달하던 수박 생산 면적은 5년 만인 올해 3분의 1 수준인, 60ha로 줄었다. 수박밭에는 수박 대신 당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이곳의 작목 전환 분위기는 농산물 도매업체들이 이끌었다. 35년 동안 대산면에서 수박 농사를 했던 박윤식(68)씨는 5년 전 당근 도매상들과 계약을 맺었다. 박씨는 "수박은 손이 많이 가 힘에 부치는 작물이라 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작목 전환했다"고 말했다.
물론 수박 재배 면적 감소는 작목 전환을 통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론 재배 면적이 급증한 전북 수박 산지 고창군 무장면이 대표적이다. 선운산농협에 따르면 멜론 재배면적(생산량)은 5년 전 20ha(500톤)에서 지난해는 60ha(1,600톤)로 3배나 늘었다. 농협 관계자는 "재배면적 3.3㎡당 수박은 2만 원, 멜론은 2만5,000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로 인한 여름 과일 주산지의 작목 전환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올해 발간한 '과채 및 과일 수급 동향과 전망’에 따르면, 2010년 6,215ha였던 참외 재배면적은 지난해 3,595ha로, 10년 사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수박은 2010년 1만6,000ha에서 지난해 1만1,580ha로, 30%가량 줄었다. 김승로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유통조성팀장은 "참외와 수박 등 많은 손길이 가는 여름 과일 반입이 줄고 있다”며 “이는 고스란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가락도매시장 수박 반입량은 2014년 8만6,000톤에서 지난해 5만4,000톤으로, 37%가량 줄었다. 이 과정에서 수박 가격은 1㎏당 2014년 1,042원에서 지난해 1,530원으로, 47% 상승했다. 국승용 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장은 "농촌 고령화로 작목 전환이 이어지면 기존 과일 수급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이는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며 "귀촌과 청년농업 장려 등 중장기적 안목에서 대책을 세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