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군인 단둘이 한 차량에 타려면

입력
2021.06.17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남녀 장병이 부득이 신체 접촉을 해야 할 땐 한 손 악수만 해야 한다. 남녀 장병이 1대 1로 차량에 동승해선 안 된다."

2015년 1월 군 내 성희롱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육군 내에서 논의된 '성군기 개선을 위한 행동수칙 개정안'의 일부다. 물론 최종 개정안에 포함되진 않았다. 유독 '시스템 개선'을 통한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군 조직 특유의 분위기를 보여준 대목인 듯하여 굳이 들춰내 봤다.

상관의 성폭력과 이를 무마하려는 조직적 압박에 시달렸던 공군 A 중사의 생전 모습엔 비장한 구석이 있다. 그는 성추행이 이뤄진 차량 내 블랙박스 영상을 직접 확보해 증거로 제출했다. 국선 변호인이 있었지만, 양성평등센터 성고충 상담관에게도 수십 차례 상담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성추행을 당한 뒤 이를 신고할지 말지 고민하는 숱한 이들과 달리 차량에서 내려 곧장 상관에게 신고했다.

A 중사는 이번뿐 아니라 지난해에도 또 다른 상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며 어금니를 악물었던 것 같다.

달리 보면, 그의 행동엔 군의 성폭력 사건 대응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묻어난다. 군사경찰의 수사가 착착 진행될 것으로 여겼다면, 애써 블랙박스를 직접 확보할 이유는 없다. 국선 변호인이 공군을 상대로 야물게 덤빌 것으로 믿었다면, 수십 차례 상담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성추행을 당한 직후 곧장 신고한 행동도, '고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동료들의 회유·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점을 그간의 군 생활에서 체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 예방 시스템을 취재할 동안 군 당국자들은 "시스템은 있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이번 사건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신고 직후 이뤄져야 하는 '가해자-피해자 분리 조치'가 늦어졌고, '신속한 수사 원칙'은 있었는데,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스템과 원칙은 차고 넘치는데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군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군인권센터 부설 군 성폭력상담소(상담소)에 따르면, 공군 부사관의 여군 숙소 불법촬영 사건을 수사하던 군사경찰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자가 널 많이 좋아했다더라. 호의였겠지"라는 등 피해자를 대놓고 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놈이랑 놀지 말고 차라리 나랑 놀지 그랬냐. 얼굴은 내가 더 괜찮지 않냐"라고도 했다.

A 중사가 어째서 직접 블랙박스를 확보해야만 했는지, 수십 차례 상담관을 물고 늘어져야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수사 당국이 되레 피해자를 성희롱하고 있는데 시스템이 다 무슨 소용인가. 2차 가해를 피하기 위해 자청해 부대를 옮겨 갔는데, 거기서도 관심병사 취급당하는 판에 '가해자-피해자 분리'는 무엇이고, 양성평등센터가 있고 없고가 대수인가.

국방부가 '성폭력 예방 제도 개선 전담팀(TF)'을 구성했다고 한다. 전에도 비슷한 이름을 댓 번은 들었던 것 같다. 군인을 여성으로 보는 그 '눈동자'는 그대로인데 허구한 날 제도 개선한들 나아질까. '남녀 장병의 한 차량 동승 금지'가 아니라 동승해도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를 만드는 게 먼저다.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먼저 각자가 잘하자.


조영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