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상사가 선물한 시계, 몰카였어요" … 한국의 최첨단 성범죄 수법

입력
2021.06.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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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단체 HRW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 내

어느 날부터 직장 상사가 이예린(가명·30대)씨에게 추근대기 시작했다. 유부남이라 이씨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는 상사가 이씨에게 시계를 선물했다. 흔하니 흔한 디지털 탁상시계. 별 생각 없이 퇴근길에 가져다 침실에 던져뒀는데, 깜빡거리는 빨간 불빛이 신경 쓰여 며칠 뒤 옆으로 살짝 치워뒀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짝 치워둔 그 다음 날, 직장 상사는 시계를 돌려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곤, 퇴근한 뒤 뭔가 께름칙한 느낌에 같은 모양의 시계를 열심히 검색했다.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곧 광고 문구가 하나 떴다.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영상을 제공합니다.' 탁상시계 안에 숨겨진 카메라가 영상을 찍어 지정된 스마트폰으로 송출하는, 불법촬영(몰카)용 특수시계였다.

그 직장 상사는 결국 징역 10개월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여전히 찜찜하다. 카메라를 발견한 다음 날 따져 묻는 이씨에게 상사는 "그거 검색하느라 밤 샜니?"라고 되물었다. 인터넷 검색하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전송돼서다. 아니나 다를까,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이씨가 방 안에서 뭘 했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이씨는 '유포됐구나'란 직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이런 이씨의 경험은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세계 여러 나라 중 한국, 딱 한 곳만 콕 집어 '디지털 성범죄 사례'를 연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일러준다. IT강국이라 일컬어지는 한국이기에 또 그만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불법촬영물 피해 또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 인식은, 최첨단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다.

"한국, 디지털 성범죄 만연" 국제인권단체의 진단

HRW는 16일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례를 추적 조사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비동의 성적 촬영물 이용한 범죄)'를 공개했다. 2019년부터 약 2년여에 걸쳐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실제로 입은 여성 12명, 그리고 방송통신위원회와 여성가족부 등 관련 정부기관 관계자, 민간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물이다. 국제인권단체가 오롯이 한국 디지털 성범죄 실태에 집중 조사해 내놓은 첫 보고서다.

보고서를 쓴 헤더 바 여성권리부문 디렉터가 직접 또는 화상으로 만난 피해자들은 다양한 얘기를 털어놨다. 그 얘기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 수사 및 사법당국의 2차 가해, 가벼운 처벌 등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피해자에게 "벌금 500만 원도 안 나오는데 기소할 거냐"고 되묻는 검사, 몰래 촬영한 혐의로 두 번째 체포됐지만 집행유예를 선고해 풀어주는 법원, 전 여자친구의 얼굴과 직장이름에다 주소까지 온라인에 모두 공개해버린 가해자 등에 대한 이야기다.

눈부신 기술 발전…성평등 인식은 뒷전

바 디렉터는 이런 일의 원인을 "기술에 비해 한참 뒤처진 성평등 인식"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에는 성불평등 문화가 뿌리박혀 있는 데다 형사사법제도 관계자 대부분이 남성"이라며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낮은 양성평등지수(156개국 중 102위), 높은 여성 무급 노동 비율(남성 대비 4배) 등을 들었다.

법 체계도 문제로 봤다. 예컨대 불법 촬영물을 삭제하게 하려면 민사소송을 진행해야 하고, 민사소송을 진행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형사재판부터 끝내야 한다. 대개 형사상 유죄 판결이 나와야 민사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 디렉터는 "유독 한국에서만 형사판결 이후를 기다려야 한다"며 "이 때문에 피해자는 피해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줄일 시기를 놓치게 되고, 불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모범사례로 만들어야

HRW는 한국 상황에서 희망의 씨앗도 찾았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만을 전담하는 센터를 운영하는 건 세계적으로 한국이 유일하다. 물론, 센터의 존재 자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했고, 운영 자금 문제로 활동의 보폭을 크게 늘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은 한계다.

센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도 제시했다. 디지털 성범죄 신고를 받았을 때 단순히 가해자 색출과 처벌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불법촬영물 삭제 등 기술적 지원에다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충격을 감안한 정서적 지원까지, 이 모든 걸 유기적으로 연결한 하나의 모델로 발전시켜야 한다. HRW는 이 모델을 잘 살려나가면 "타국이 벤치마킹할 만한 대표적 대응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평가했다.

이외에도 HRW는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 강화, 성인지 감수성 교육 확대, 사법기관의 적극적인 디지털 성범죄 사건 수사·기소 등을 권고했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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