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과 변호사 간 의사교환에 대한 비밀유지권(Attorney-Client Privilege), 이른바 ‘비닉특권’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재야 법조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변호사도 이를 기초로 자유롭게 법적 조언을 할 수 있어야만 헌법이 규정하는 ‘변호사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비닉특권의 입법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는데 21대 국회에서도 조응천 의원이 비닉특권 도입을 위한 변호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여 현재 법사위 소위원회에 회부되어 있는 상태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누구든지 직무와 관련하여 변호사와 의뢰인 간 비밀리에 이루어진 의사교환 내용 등에 대해서는 의뢰인의 승낙이 있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공개, 제출 또는 열람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 또한 이를 위반하여 수집된 증거는 재판이나 행정절차 등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수사기관의 압수, 수색이나 행정기관의 현장조사에서 의뢰인이 소지하는 변호사의 법적 조언 관련 문서가 아무런 제한 없이 압수되고 유죄의 증거로 현출될 수 있다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변호사-의뢰인 비닉특권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할 만하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국들도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러한 비닉특권을 도입하여 관련 제도를 운용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의뢰인-변호사 비닉특권은 주로 서구의 사법시스템하에서 발달해 온 것이며 남용 위험성도 적지 않으므로 이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들이 갖춰져야 한다. 우선 이러한 비닉특권이 민사재판 절차에도 적용되려면 증거를 갖지 않은 당사자가 상대방이 소지한 증거를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증거개시(Discovery)'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변호사 비밀유지권이 도입된 서구 선진국들의 경우 소송 당사자가 직접 상대방이나 제3자가 갖고 있는 자료 등을 확보하여 유리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증거 은닉, 조작 등 입증 방해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실 비닉특권은 이러한 증거개시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발달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실효성이 거의 없는 문서제출명령제도만 있을 뿐 증거개시 제도가 없어 비닉특권까지 도입된다면 가뜩이나 증거 확보가 어려운 약자가 증거를 가진 대기업 등을 상대로 싸우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또한 사법방해(obstruction of justice)에 대한 효과적인 제제수단도 도입되어야 한다. 사법방해란, 거짓 진술이나 허위자료 제출 등으로 수사나 재판 절차를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미국, 프랑스, 중국 등지에서 이를 중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증거를 숨기거나 인멸하는 행위, 허위자료를 제출하거나 증인의 출석을 방해하는 것까지 모두 사법방해죄로 넓게 보고 있으며 형량도 원래 저지른 범죄보다 더 무겁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 위증죄나 증거인멸죄가 성립할 뿐이고 처벌도 미약해서 수사기관에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허위 주장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닉특권의 도입은 필요하지만 이러한 비닉특권이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도구로 악용되지 않도록 관련 제도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