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A씨는 최근 경기 남양주시 신축 건물에 약국을 열려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건물 분양 대행사로부터 임차료 외에 3,000만 원을 추가로 요구받은 것이다.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고 세금 신고도 하지 않을 '눈먼 돈'이었다.
알고 보니 이 돈은 해당 건물에 입점한 병원에 주는 지원금, 다시 말해 일종의 상납금이었다. 병원이 입점할 때 분양가에서 3,000만 원을 할인해준 시행사가 약국으로부터 이 돈을 보전받는 방식이었다.
14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대행사 관계자는 A씨에게 "병원 측에서 약국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분양가에서 3,000만 원을 깎아달라고 했다"며 "병원이 약국에서 받아야 할 3,000만 원을 미리 빼 준 대신 시행사가 약국에서 그 돈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병원 측과 사전 협의가 있었다는 증거로 A씨에게 한 장짜리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엔 '약국 입점에 최대한 협조한다'는 문구와 병원장 사인이 있었다.
부당한 요구라고 여긴 A씨는 공인중개업소를 통해 같은 건물의 다른 점포와 계약을 시도했지만 대행사가 제동을 걸었다. 대행사가 공인중개업소에 "약국 매물을 중개하지 말아라" "중개를 하려거든 3,000만 원을 대신 받아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A씨는 결국 해당 건물 입점을 포기했다.
약사계에 따르면 최근 약국과 병원 간 지원금 수수 실태가 논란이 된 이후 정부에서 단속을 강화하기로 했지만, 지원금 요구는 버젓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본보가 확보한 지원금 요구 사례는 최근 두 달 사이에만 △서울 송파구 내과·소아과·정형외과(처방전 일일 발급 건수 100건 이상 시 1억 원 후불) △경기 부천시 준종합병원(처방전 60~80건 4,000만 원) △경기 화성시 내과·소아과·정형외과(4,000만 원) 등 여러 건이었다.
지난달 경기 파주시에서 처음 약국을 열려던 B씨도 지원금 요구를 받았다. 병원이 브로커를 통해 제시한 조건은 하루 처방전 150장 이상에 5,000만 원이었다. 내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등 여러 진료과가 있는 큰 병원이었지만, 임대료 1억 원에 지원금까지 더하면 지출 규모가 너무 커서 B씨는 결국 개국을 미뤘다.
약사들은 병원에 상납하지 않으면 원하는 장소에 약국을 열기 어렵고, 열더라도 불이익이 따른다고 하소연한다. 지난달 약사 자녀를 둔 청원인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는 의사 지원비 및 리베이트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병원 지원비 요구는 엄연한 불법 행위다. 약사법에서는 처방전 알선 대가로 금전 등을 주고받은 경우 양측 모두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불법 행위가 만연하면서 의약분업 취지가 훼손되고 탈세 등의 문제가 뒤따르고 있다. 병원과 약국의 유착으로 불필요한 의료비를 지출하게 되는 환자 또한 피해를 입게 된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의약분업의 취지는 처방 및 조제 단계에서 약사와 의사가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것인데, 지원금이 오가면 갑을관계가 형성되기 쉽다"며 "의사가 불필요하거나 비싼 약을 처방하더라도 약사가 이를 견제하지 못해 환자 의료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의사 측을 대변하는 대한의사협회는 지원금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원론적 답변을 내놨다. 의협 관계자는 "법적 판단이 나온 게 아니라서 뚜렷한 입장을 내긴 어렵다"며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회원에 대해 징계를 경고하고 있고, 여기엔 지원금 요구도 포함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