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공정성

입력
2021.06.0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미국에서 거의 제로(0) 세금을 내는 억만장자 25인의 납세자료가 공개돼 공정성 논란이 뜨겁다.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플리카에 따르면, 2018년 25인의 부는 1조1,000억 달러. 일반 월급쟁이 1,430만 명의 연 수입과 같았다. 반면 이들이 낸 세금은 19억 달러로 봉급 생활자 1,430억 달러의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지 소로스는 3번, 제프 베이조소와 칼 아이칸은 2번, 일론 머스크와 마이클 블룸버그는 1번, 단 한 푼의 소득세도 내지 않았다.

□ 물론 기업가인 이들 부자의 미실현 평가액을 기준으로 세금이 적다고 비판하는 건 잘못이다. 상승한 집값에 소득세를 부과하는 논리와도 같다. 탈세가 아닌 절세로 줄어든 부자 세금을 비난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억만장자보다 자신의 세율이 높다는 데 있다. 세율은 버핏이 0.1%, 베이조스 1.1%, 블룸버그가 1.3%였고, 전체 25인의 평균 세율은 3.4%에 그쳤다. 소득 기준으로 따져도 평균 16%여서, 미국 보통사람 배관공의 세율 30%를 훨씬 밑돌았다.

□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은 부자와 기업들이 세금 시스템을 인질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1952년 기업의 납세액은 전체 조세수입의 32%를 차지했는데 2020년엔 7%로 내려왔다. 역대 정부가 부자, 기업 감세를 한 결과지만, 덕분에 증가한 이익이 투자로 유인된다는 낙수효과는 부정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 조사에선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부담이 얼마나 불공정한지 묻는 질문에 ‘아주 그렇다’가 각각 59%, ‘약간 그렇다’는 21%와 22%로 불신이 팽배했다.

□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거둔다고 당장 바뀌는 건 없다는 자조도 커지고 있다. 납세의 공평은 확보되겠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이 부자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제 부자 문제는 세금이 아니라 그들이 마치 해결사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과도해진 점이란 지적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빌 게이츠 부부의 이혼을 두고 ‘부자는 만능’이란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란 평가는 이런 취지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코로나 백신 확보와 관련해 ‘로보트 태권V’가 아니다고 말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