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저버린 등록임대주택제도

입력
2021.06.10 04:30
26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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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영화 ‘넘버3’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 말 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어설픈 킬러로 분한 송강호는 말을 더듬는 놀라운 애드리브로 대형 배우의 등장을 알렸고 이 장면은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배신은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나 소설의 단골 소재다. 조폭 중에서도 최고 악질인 배신자들은 신뢰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자신을 믿어준 보스나 친구의 등 뒤에서 서슴없이 칼을 꽂는다.

요새 현실에서도 배신이란 단어를 목 놓아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에 이른다. 민간매입임대주택을 지방자치단체와 관할 세무서에 등록한 임대사업자(등록임대사업자)들이다. 이들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를 배신자로 지목하고 있다.

배신의 역사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정부는 임대주택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정책 앞에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상생'이란 근사한 수식어도 붙였다. 민간 임대주택 등록을 유도해 세입자의 주거불안을 해소하는 게 목적이었다. 임대료 인상률 연 5%에 임대기간을 4년 또는 8년으로 제한하는 대신 집주인에게는 양도소득세 중과 배제 및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 건강보험료 감면 등의 혜택을 주기로 했다. 당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다주택자들은 집을 팔든가 임대주택으로 등록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등록을 독려했다.

2017년 말 26만 명 규모였던 등록임대사업자는 1년 만에 40만 명 이상으로 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정부는 이듬해 9·13 대책, 2019년 12·16 대책, 지난해 7·10 대책을 통해 임대사업자 및 임대주택 등록 요건을 계속 강화했고 세제 혜택은 단계적으로 축소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달 말 더불어민주당 부동산특위는 모든 유형의 민간매입임대주택 신규 등록 폐지와 등록 말소 후 6개월 내 매도 시에만 양도세 중과 배제 혜택을 유지하는 처방을 꺼내 들었다. 사실상 등록임대주택 제도 ‘사망선고’다.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배경에는 주택 공급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다주택자들을 매물 잠김의 원흉으로 보는 데다 완성된 ‘임대차 3법’이 민간임대주택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등록임대사업자들은 이 지점에서 극도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4년 전에는 상생을 운운했냐는 것이다. 수도권 외곽에 임대주택 두 채를 보유한 한 지인은 “졸지에 주택 공급을 방해하는 적폐가 됐다. 정부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혀를 찼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등록임대주택 폐지가 매물 증가와 집값 안정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임대 물량 대부분이 실수요자가 선호하는 아파트가 아닌 탓이다. 오히려 중저가 임대주택이 줄어 저소득층의 주거가 불안해지는 역효과를 우려한다.

등록임대사업자들의 반발이 거세자 민주당 부동산특위는 재검토에 들어갔다. 생계형 사업자에 한해 종부세 합산 배제 혜택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결과를 내놓더라도 이미 신뢰는 무너졌다. 하긴 이번 정부 들어서 신뢰를 상실한 부동산 정책이 이것뿐이랴. 집값을 잡겠다는 최우선 정책마저 공염불이 된 지 오래니.

김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