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却下)는 본안 심리 없이 소송을 종료하는 결정이다. 소송을 뒷받침할 법적 근거가 없거나 소송 당사자가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소송이 적법하지 않을 때 재판 없이 소 제기를 물리치는 것이다. 반면 기각(棄却)은 본안 심리 후 소 청구의 이유가 없다며 배척하는 결정이다. 각하는 흠결 부분을 해소한 뒤 다시 재판을 신청할 수 있지만, 기각은 상소를 통해서만 다툰다. 소 제기 후 수년 뒤에야 각하 결정을 받으면 소송 당사자의 허탈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7일 일제 전범 기업들에 대한 손배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2015년 5월 소 제기 후 감감무소식이던 법원은 6년 만인 지난달 28일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심리는 그날 바로 종결됐다. 선고기일은 10일로 잡혔지만 재판부는 갑자기 3일을 앞당겨 선고를 기습 강행했다.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을 고려해 선고기일을 변경했다”니, 재판부엔 소송 당사자의 역사적 아픔보다 각하 결정 시 법정 소란을 더 우려한 듯하다.
□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충격이 컸던 것은 2018년 10월 이들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승소 기대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2년 8개월 전 대법 판결과 다른 하급심 재판부가 잇따르고, 악화된 한일 관계의 회복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점이 이들에겐 불안과 부담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과연 이날 법원 결정은 이런 정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대법 판결을 부정하고 싶은 법관 개인의 소신 있는 판결일까.
□ 한일협정에 따른 개인청구권 불인정은 과거에도 있었고, 국내법으로 국제조약을 의율할 때의 위험과 역효과에 대한 지적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한강의 기적’에 큰 기여” “강제징용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한미동맹 악화, 국가 위신 추락”처럼 개인의 주관적 역사관이나 정치ᆞ외교적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판결의 배경과 의도를 의심케 만든다. 대법원장이 강조하는 ‘좋은 재판’은 법리에 충실하되 사안의 성격을 고려하고 소송 당사자 입장을 배려하며 진행하는 재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