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의 적들

입력
2021.06.06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얼마 전 징병제에 대한 갤럽의 설문조사 결과 여성들이 남녀 모두 징병에 찬성하는 비율(47%)이 남성의 찬성 비율(4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대 여성은 13%포인트나 더 많은 이들이 '남자만 징병'(35%)보다 '남녀 모두 징병'(48%)에 손을 들었다. 젠더 이슈만 나오면 반복되는 "여자들은 왜 군대 안 가냐"라는 젊은 남자들의 항변을 뒤집는 결과다. 군 경험을 "인생 낭비"로 기억하는 중년 남성들은 "도대체 왜?"라며 더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 페미니스트들은 군복무 의무를 남녀가 나눠 짊어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과거 여성의 징병 참여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학계가 성평등과 군대 문화 개선을 위해 논의한 지 오래다. 그러나 고민이 진지할수록 드러나는 난관은 여자들이 아니라 군대가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지적이다.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문화에선 여성 군복무가 오히려 여성 혐오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 실제로 군대는 복무 중인 여군을 어떻게 취급하나. 성추행당한 후 혼인신고일에 비극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군대의 조직적 감싸기의 절정이다. 보고받은 상사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고 현장 목격자는 "인지하지 못했다"고 발뺌했으며 "부대에 피해를 미친다"며 은폐 압박이 이어졌다. 공군참모총장에게 43일 만에, 국방부 장관에게 84일 만에 보고된 사실은 군 지침도 무용지물임을 드러낸다. 얼마 전 여군 숙소를 침입해 불법 촬영한 공군 부사관도 멀쩡히 부대생활을 하다가 군인권센터가 폭로한 뒤에야 구속됐다.

□ 군의 실상은 여군 징병과 거리가 멀다. 여군을 동등한 군인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 공고한 성차별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것이며 군대이기에 가장 극단적 형태로 남아 있다. 여군을 목숨 바쳐 서로의 뒤를 지켜야 할 전우로 여긴다면 성폭력이나 "살면서 한 번쯤 겪는 일"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적군과 싸우도록 허락된 군의 폭력성이 여군을 향하고 있다는 현실을, 여군은 적군이 아닌 남군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처지임을 무겁게 돌아봐야 한다.

김희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