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왕국 일본이 뒤늦게 웹툰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웹툰 문법과 출판만화 문법이 너무 달라, 아직 트렌드에 맞는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2일 도쿄 신주쿠구 사무실에서 만난 이현석(47) 엘세븐 대표는 현재 일본의 웹툰 제작 역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엘세븐은 이 대표가 일본에서 2년 전 설립한 웹툰 제작사로, 주로 한국 웹소설을 기반으로 제작해 한일 양국의 웹툰 플랫폼에 연재한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국에서 네이버, 일본에선 라인망가에 연재되는 ‘전지적 독자 시점’과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도굴왕’ 등이 있다.
애초 만화 스토리작가였던 이 대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유명 게임회사 스퀘어에닉스의 만화편집부에서 10년 동안 작품 개발과 작가 섭외 등 편집자로서 일했다. 이후 NHN의 일본 자회사가 설립한 웹툰 플랫폼 ‘코미코’에서 일하며 한국 웹툰 산업에 대해 이해를 넓혔고, 2019년 엘세븐을 설립했다.
1인 회사로 시작한 엘세븐은 2년 만에 수십억 원의 연 매출을 올릴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 대표는 그 이유로 2016년 일본에서 카카오가 설립한 웹툰 플랫폼 ‘픽코마’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산 웹툰을 중심으로 웹툰 시장이 급성장한 것을 꼽았다. 픽코마는 지난해 일본 스마트폰 앱 시장에서 게임을 제외한 앱 중 매출 1위를 기록했다.
그는 일본 만화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출판만화 기업이 보수적 조직문화 등의 이유로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 수십만부를 찍던 소년 만화잡지가 지금은 수천부를 찍는다”며 “젊은 직원들 중에는 매체 환경변화에 따라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거대한 조직 특성상 신속하게 제작 시스템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본 출판과학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만화시장은 총 6,126억 엔(약 6조2,000억 원)에 달해 1978년 통계 작성 후 사상 최대가 됐지만, 이 중 만화잡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627억 엔에 불과했다. 반면 디지털 만화 시장은 전년 대비 31.9%나 증가한 3,420억 엔으로 출판만화(단행본+잡지) 매출을 웃돌았다.
일본 만화가 웹툰 시장에서 고전하는 것은 출판만화와 웹툰의 근본적 차이에도 기인한다. 웹툰은 대부분 흑백인 출판만화와 달리 100% 컬러를 입히고 아래로 쭉쭉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형식이다. 스토리도 전통적인 일본 만화와 다르다. 이 대표는 “스마트폰 세대 독자들은 주인공의 ‘성장’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며 “대사량도 적고 속도감 있는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데, 이는 한국의 웹소설이나 웹툰의 특징”이라고 한국 웹툰의 인기 비결을 설명했다.
엘세븐은 속도를 중요시하는 웹툰 독자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분업 체제도 도입했다. 웹소설 플랫폼에서 이미 검증된 원작을 찾고, 스토리 작가, 그림 작가와 별도 계약을 맺는다. 스토리 작가가 콘티를 짜면 그림 작가는 선화만 그리고 채색은 별도 회사가 담당한다.
이 대표는 “일본 출판만화 회사들이 뒤늦게 내부에 웹툰 연구반을 설립하고 시험작들을 내고 있다”며 “20년간 일본 만화업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웹툰이 일본에서 계속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