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본사 직원이 업무상 괴로움을 호소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을 계기로 국내 정보통신(IT) 업계의 경직된 기업문화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네이버·카카오 등 IT 대기업에서 잇따라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불거지면서, 적극적인 실태 파악과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1일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IT위원회가 지난해 10월 12일부터 한 달간 진행한 경기 성남 판교지역 IT·게임 노동자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809명의 절반에 가까운 47.4%(383명)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 또는 목격한 적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적극 대응했다'고 응답한 이는 67명(17.5%)에 그쳤고, 이보다 5배가량 많은 316명(82.5%)이 '대응하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민주적·수평적 노동문화로 상징되는 IT 업계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직장 내 괴롭힘을 겪고도 침묵하고 있다는 얘기다.
IT 산업의 빠른 성장으로 몸집을 불린 IT 업계에선 수년 전부터 갑질 등 문제로 잡음이 일어왔다. 2018년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계열사인 웹하드업체 위디스크 직원을 폭행하는 영상이 공개돼 파장이 일었고, 지난 2월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가 회사 조직 문화와 성과 평가 방식을 비관하는 글을 게재해 논란이 됐다. 당시 이 글은 유서 아니냐는 추측도 불렀는데, 카카오 측은 글 게재 전후로 극단적 선택을 한 직원은 없다고 밝혔다.
IT 업계 안팎에서는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끼리끼리 문화'를 수직적 조직 구조의 주요인으로 꼽는다. 학연, 이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 등이 인사를 비롯한 업무 전반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업계가 좁고 이직이 잦아 '평판'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환경도 사내 문제를 외면하는 풍토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판교의 IT 업체에 근무 중인 정모(34)씨는 "일부 공통점을 기반으로 끌어주고 키워주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상사의 눈 밖에 나면 회사 생활 자체가 어려워져 쉬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스타트업에서 시작한 기업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는 사이 내부 소통 체계가 적절히 발전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네이버의 경우 사내 고충처리 채널인 'With U'를 통해 직장 내 성희롱 및 괴롭힘 관련 익명 제보를 받아 처리하고 있다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IT 회사의 내부 문제가 조직 바깥의 익명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공론화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년 전 네이버에서 퇴사했다는 IT 업계 관계자는 "부적절한 언행을 하는 인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도 사측에서 침묵하는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다"며 "부하 직원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포기하거나 이직을 선택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IT 업계의 명확한 노동 실태와 구조 개선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창의성과 유연함을 무기로 하는 IT 업계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부 기업이 기존 국내 대기업의 수직적 문화를 닮아간 측면이 있다"며 "개별 회사뿐 아니라 IT 산업 전반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기업 문화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부가 나서 예방 및 구제 장치 마련을 유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조현지 직장 내 괴롭힘 전문 노무사는 "아직까지 직장 내 괴롭힘 기준이 모호해 피해 신고 자체에 어려움이 많다"며 "정부가 나서서 기업과 함께 고충 상담 창구를 어떻게 구축할지, 갑질 예방 매뉴얼은 어떻게 갖출지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정착 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