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은 없는데 대리투표는 있다'... 독특한 베트남 총선

입력
2021.06.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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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국과 다른 베트남 선거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총선)가 열린 지난달 23일 오전. 서둘러 하노이 남뜨리엠군의 한 투표소를 찾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총선, 그들의 투표 열기가 민주국가와 얼마나 다를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길게 줄지어 선 투표소 전경을 상상했던 기자의 기대는 금세 어긋났다. 공안에게 쫓겨나기까지 한 시간여 동안 성인 남성 몇몇만 투표소를 찾았을 뿐이다. 몇 군데 둘러본 다른 투표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낮 기온이 37도까지 오르자 사람 구경은 하기도 어려웠다.

총선 이튿날, 베트남 정부는 “진정한 국민 축제의 장이 된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99.43%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사실상 전 국민이 투표했다는 뜻이다. 인구 9,800만 명을 자랑하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중심가에도 보이지 않던 유권자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단순한 선전전이라고 하기엔 발표 수치가 너무 구체적이었다. 찾아보니 14대 총선 투표율 역시 99.35%로 엇비슷했다. 여기에 국회 상무위원회의 재검표 자료까지 공개한 점을 감안하면 대놓고 조작한 건 아닌 듯했다. 현실과 통계의 엄청난 괴리, 진실을 들여다봐야겠다.

베트남 선거에만 있는 세 가지

답은 베트남 선거법 69조 3항에 숨어 있었다. “투표용지를 직접 작성하기 어려운 유권자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부탁할 수 있다.” 한국처럼 직접·비밀 선거를 대원칙으로 하되, 투표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리투표’를 허용한 것이다. 투표소에서 본 남성들도 가족을 대표한 대리투표인이었다는 얘기다. 투표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오토바이 역시 선거의 핵심 요소였다. 오토바이 뒤에 달린 나무 상자는 선거함, 운전자는 노약자나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들을 상대로 ‘출장투표’를 진행한 공무원이었다.

베트남은 출장자에게도 대리투표를 권장한다. 투표소를 방문할 여건이 안 되는 출장자는 당국에 사전신고를 한 뒤 거주지가 아닌 출장 지역구 후보자들에게라도 투표해야 한다. 만약 투표를 거부하거나 누락하면 장문의 사유서 제출이 필수다. 투표 불참이 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사유서를 냈다는 자체만으로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다.

투표를 계속 빼먹으면 나중에 국회의원은 물론 지방 인민위원회 대의원 등 모든 공직선거에 입후보할 수 없다. 총선 후보자 추천 및 등록을 총괄하는 조국전선위원회의의 첫 번째 심사 기준이 바로 ‘애국심과 애민(愛民)정신’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측량하기도 어려운 애국심 항목은 과거 미군정 부역자 가족과 반(反)정부 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최근에는 공산당 정체성에 반하는 후보자의 지나친 서구화 행적도 걸러낸다고 한다.

기표소에 도장 대신 자와 펜이 구비돼 있는 점도 우리와 다르다. 투표 방법은 이렇다.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의 이름에 자를 댄 뒤 옆으로 쭉 줄을 긋는다. 동그라미와 ‘X’자 표식은 안 된다. 정확히 정중앙을 명확하게 가로질러야 한다. 실수로 줄이 삐뚤어지면 투표참관인에게 새 투표지를 달라고 하면 된다. 노약자와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대리투표를 허용한 것이 이해될 만큼 절차가 꽤 까다롭다.


유세·돈·보궐선거는 없어

또 베트남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총선이 언제 치러졌는지 대부분 눈치채지 못한다. 그 흔한 거리 유세 하나 없고, 하다 못해 후보자 면면과 공약을 알리는 현수막과 벽보도 보이지 않는다. 선거철임을 유추할 수 있는 표식은 아파트와 마을 입구에 설치된 후보 약력 및 주요 공약 소개 입간판이 유일하다. 후보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조국전선이 각 가정에 발송한 후보 자료집을 살펴봐야 한다.

유세가 불허되니 후보자들이 돈 쓸 일도 없다. 베트남은 선거 ‘완전공영제’를 표방해 투·개표 등 모든 선거 비용을 전액 국가가 부담한다. 심지어 당선자가 나오지 않아도 보궐선거조차 치르지 않는다. 14대 국회 역시 정족수 500명에 못 미친 491명 체제로 운영됐다. 4곳은 당선 전제인 과반 득표자가 없었고, 2명은 당선 후 개인 비리가 드러나 의회에서 쫓겨났다. 이 밖에 사망 두 명, 자진 사퇴 한 명이 있었다.

총선이 무조건 일요일에 열리는 점도 유별나다. 평일 하루, 잠깐 투표를 한 뒤 꿀맛 같은 휴식을 보내는 호사는 베트남에 없다.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현지인들은 “그게 뭐가 대수냐”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성장을 위해 공휴일을 최소화한 베트남의 올해 법정공휴일은 구정 및 신정 연휴 엿새를 제외하면 단 5일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국가이니 성탄절 등을 쉬지 않는 건 당연하고, 추석에도 정상 근무한다. 참고로 베트남은 아직 주 6일제가 시행되는 나라다.

기표 방식이 복잡해 개표 역시 오롯이 손으로 이뤄진다. 최종 당선자는 선거일로부터 20일이 지난 12일 일괄 발표된다. 의원들은 임기 5년 동안 입법권을 행사한다. 정부 각 기관의 활동을 보고받고 감시하는 역할은 한국과 같다. 다만 베트남 국회는 임기 내 주요 정부 수장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한 번은 꼭 진행해야 한다. 불신임 전례가 없어 요식행위나 다름 없지만, 신임률의 높고 낮음은 차기 당 대권 주자를 가려내는 지표가 돼 권력자들이 은근히 신경을 쓴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