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망이 깎는 노인? 코로나에 나만의 수저 깎는다

입력
2021.06.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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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잡념까지 깎아내는 우드 카빙

편집자주

코로나19로 집 안에 콕 갇혔나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단조롭고 답답한 집콕생활에 조금이나마 활기를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격주 수요일 ‘코로나 블루’를 떨칠 ‘슬기로운 집콕생활’을 소개합니다.

주부 최인희(38)씨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작은 칼로 나무를 깎아 숟가락과 젓가락, 버터나이프, 주걱 등을 만드는 ‘우드 카빙(Wood Carving·목각)’이다. 육아와 집안일로 온종일 바쁘지만 틈이 날 때마다 도구상자를 열고 나무를 깎는다. ‘슥슥’, ‘사각사각’하는 나무 깎는 소리에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코로나로 육아부담이 커지고,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전쟁이 된 일상에서 저만의 힐링 아이템이 필요했는데, 간편하게 할 수 있고, 나무 만지는 느낌과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서 불끈불끈 솟아나는 짜증이나 화를 가라앉히는 데 효과만점이에요.”


숟가락, 나이프, 그릇…내 손으로 슥삭슥삭

나무 깎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에 집에서 혼자 작은 나무로 숟가락과 조리도구, 도마와 작은 그릇 등 식기를 만드는 우드 카빙이 새로운 힐링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설명서와 나무, 칼, 도구 등이 포함된 DIY키트를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유튜브 등에는 나무 깎는 요령, 칼 고르는 법 등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 누구나 쉽게 해볼 만하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인 ‘클래스101’ 관계자는 “코로나 영향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우드 카빙 관련 온라인 강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며 “주로 2030세대들이 많이 듣지만, 중·장년층의 문의도 꽤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클래스101의 우드 카빙 관련 강의 수는 3개에서 5개로 늘어났다.

우드 카빙으로 만드는 것은 주로 식기다. 호두나무, 흑단나무, 느티나무 등의 나무토막을 깎아 숟가락과 젓가락, 주걱이나 쿠킹 스푼 등 조리도구 등을 만든다. 테이블이나 의자와 같이 부피가 큰 가구들은 별도의 작업장이 필요한 데다,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반면 식기나 생활소품은 칼과 나무만 있으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숟가락을 하나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시간 안팎. 젓가락이나 포크 등은 좀 더 섬세하게 깎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린다. 우드 카빙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는 공방 ‘스푼풀’의 황메리 대표는 “수저나 식기는 초보자들이 만들기에도 어렵지 않다”며 “다만 무리하게 깎아내거나 힘 조절에 실패하면 다치거나 형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힘으로 얇게 깎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로 캠핑 등 야외활동이 늘어나면서 캠핑족들도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캠핑을 자주 가는 김민형(32)씨는 “캠핑할 때는 인위적인 플라스틱이나 차가운 스테인리스보다 감성적인 나무 식기를 많이 쓰게 된다”며 “캠핑할 때 쓰려고 수저를 깎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캠핑 가서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아 재미 삼아 나무를 깎는다”고 했다.



깎고 듣는 몰입이 주는 위안과 성취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숟가락 하나 깎는데만 족히 3시간이 소요되는 이 아날로그적 취미에 심취하는 이유는 뭘까. 황 대표는 “요즘에는 어딘가 깊게 몰입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며 “항상 바쁘게 지내다가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면서 나무를 깎다 보면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싶을 정도로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우드 카빙의 매력”이라고 했다.

유튜브에는 나무 깎는 소리를 녹음한 ‘힐링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도 등장했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숲 속 오두막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황 대표는 “우드 카빙은 오감을 자극한다”며 “저마다 무늬가 다른 나무를 보고(시각), 나무를 다듬고(촉각), 나무를 깎고(청각), 나무의 향을 맡는(후각) 일련의 과정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공감각)”고 했다.

칼로 나무를 반복적으로 깎는 행위지만 약간의 창의력도 발휘할 수도 있다. 손잡이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 깎는 법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도 있다. 오일을 여러 번 덧발라 진한 색을 낼 수도 있고, 색을 덧입힐 수도 있다. 우드 카빙 공방 ‘필드오즈’의 오지영 대표는 우드 카빙을 요리에 비유했다. “정성껏 요리를 차려 먹으면 나를 돌보는 듯한 기분이 들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날 것의 재료를 직접 다듬어서 만들어 쓰면 정서적 위안을 받을 수 있어요. 좀 서툴지만 자신만의 도구를 갖췄다는 작은 성취감도 얻을 수 있어요.”

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