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연예부 기자로 일하며 경위서라는 걸 딱 한 번 써봤다. 경위서는 어떤 사건 사고 발생 시 이를 시간순으로 첨삭 없이 문서로 기록하는 건데 '상기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일종의 반성문 성격일 때가 많다. '네가 네 죄를 알렷다'라는 회사의 엄포에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때는 여의도 시절 MBC를 출입하던 2002년. 대형 낙종을 한 게 화근이었다. 평소처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편집국에 왔는데 여느 때처럼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따끈따끈한 경쟁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한 경쟁 신문 1면을 보는 순간 얼음이 됐다. '아듀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 폐지.'
버럭 부장이 화내지 않고 조용히 말할 땐 진짜 열받은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대역 죄인이 된 나는 조용히 복도로 나가 MBC 홍보실에 전화해 사실을 확인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오보라고 해줘요. 제발.
그러나 어리석은 내 바람과 달리 홍보실에선 "다음 주 보도자료로 알릴 계획이었는데 정보가 샌 것 같아요. 우리도 지금 멘붕이에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망했다. 제대로 물먹은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난 밤 10시까지 부장과 단둘이 남아 '전원일기' 특집으로 바다 같은 지면을 채워야 했고 다음날 경위서에 사인해야 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면 회사의 어떠한 처분도 달게 받을 것임을 서약합니다.'
요즘도 리모컨을 누르다 레트로 케이블에서 '전원일기'가 나오면 급히 채널을 돌리게 된다. '전원일기'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취재를 빙자해 MBC 구내매점에서 매니저, 예능 작가들과 수다 떨고 '놀러 와' 녹화장에 가서 유재석 김원희와 만나 얘기하느라 바빴으니 열심히 발품 판 타사 기자에게 물먹어도 쌌다.
당시 '전원일기'는 수익성과 별개로 국내 최장수 드라마였고 드라마 왕국으로 불린 MBC의 자존심을 넘어 국민 드라마 그 자체였다. 경위서의 채찍 효과인지 한동안 매점 라면도 끊고 만회할 만한 아이템을 찾아 MBC를 하이에나처럼 헤맸지만 웬만한 걸로는 벌충이 되지 않았다. 그때 얻은 교훈은 중장년 연기자를 챙기자였다.
청춘스타들만 쫓다 보니 중년 배우들은 친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부터 휴일을 반납하고 일일극, 주말극 녹화 날 대기실에 가 한진희, 심양홍, 박원숙 선생님들께 깍듯이 인사하며 명함을 건넸다. 곁을 내주지 않던 중견 연기자들의 전화번호가 하나둘 입력됐고 본격적으로 연기자 조합을 드나들면서 많은 분과 친분을 쌓게 됐다.
부진의 늪에 빠진 MBC와 달리 KBS, SBS 드라마는 종합편성채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맞서 아슬아슬하게 공중파 체면을 지키고 있다. 특히 KBS는 주말극, 일일극 인기가 꺾이지 않으며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주말극은 개국 이래 난공불락으로 불릴 만큼 여전히 강세다.
올 3월부터 방송된 KBS 2TV 주말극 '오케이 광자매'도 두 달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문영남 작가의 파워를 보여줬다. '전원일기' '오케이 광자매'는 톱스타가 나오지 않고 제작비 규모도 아담하지만, 흡입력 있는 대본과 원숙한 중견 연기자들의 내공이 어우러지며 대중을 사로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식도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내실 있는 굴뚝 산업 종목에 투자하면 장기적으로 우상향에 올라탈 수 있다. 반도체나 바이오, 전기차처럼 '넘사벽' 기술력을 갖추지 않아도 사람들이 실생활에 자주 쓰는 필수재 산업이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골판지 업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택배 물량이 급증하면서 골판지 수요가 덩달아 폭증했는데 평소 이런 회사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이들이라면 계좌가 크게 불어났을 것이다.
골판지는 물결 모양으로 골을 만든 골심지 양면에 표면지, 이면지를 붙여 완충도를 높인 접합 판지다.
제지 회사가 가장 먼저 골판지 원지를 생산하고, 원단 회사가 이를 다시 원단과 박스로 2차 가공하는데 몇몇 대기업 제지 회사들이 이 3단계를 거의 수직계열화해 파이를 나눠 갖고 있다.
신대양제지, 아세아제지, 태림포장, 삼보판지, 한국수출포장이 톱5로 불린다.
택배 수요가 몰리는 명절이나 연말, 쿠팡의 나스닥 상장, 아마존의 한국 진출 소식이 들릴 때마다 이런 골판지 관련주들이 한바탕 들썩이고 영풍제지, 대림제지, 페이퍼코리아 등이 동반 관련주로 묶여 있다.
주의할 건 같은 골판지 회사라도 주력하는 사업 방식에 따라 이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대양제지, 대림제지처럼 원지 비중이 높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판지 비중이 높은 회사, 상자 만드는 데 주력인 회사가 따로 있다.
표면지를 주로 만드는 아세아제지의 경우 폐지와 펄프 가격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입해야 할 변수가 추가된다.
지난해 7월 도입된 폐지 수입 신고제 때문에 폐지 가격 인상 요인이 발생하는데 이는 아세아제지의 실적에 직결될 수 있으니 돋보기를 대봐야 하는 식이다. 골판지 상자를 주로 만드는 태림포장, 삼보판지는 쿠팡이나 아마존 이슈가 있을 때 박스 가격 인상 기대감에 다른 골판지 관련주보다 먼저 치고 나갈 가능성이 크다.
골판지 주식은 간혹 화재 사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징도 있다. 제지 회사 특성상 가동률이 높을 때 불이 나기도 하는데 지난해 10월엔 경기 안산에 있는 대양제지에서 불이 나 골판지 수급에 차질을 빚었다. 대양제지는 연간 국내 골판지 원지 공급량의 7% 이상을 담당해온 곳이라 반사 이익을 보는 곳을 찾느라 투자자들이 분주했다.
누군가의 사고와 불행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투자 아이디어가 된다는 점이 씁쓸하지만, 중력처럼 수익을 향하는 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편 회사 이름에 제지가 들어있어도 골판지 회사가 아닌 곳도 있으니 잘 구분해야 한다.
한솔제지는 백상지, 아트지, 감열지 등 인쇄용지와 특수지를 만들고, 국일제지도 담배 필터용 박엽지와 시멘트, 비료용 크라프트지를 주로 만드는 회사다. 백판지를 만드는 한창제지 역시 골판지 관련주가 아니며 모나리자, 깨끗한나라도 골판지와 무관한 제지 펄프 관련주다.
김범석 전 일간스포츠 연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