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신앙의 기초는 계시나 예언을 통하여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립한 선지자들의 삶을 추종하고 본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선지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올바른 귀감을 보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확신케 하고 그 믿음을 이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꾸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믿음의 영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더불어 이러한 선지자들의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종교로서 동질성과 유사성에 대하여 서로를 부정할 수 없다. 꾸란에는 이러한 종교들을 일컬어 아흘룰 키타브(Ahlu Al-Kitāb, 성서의 가족)로 칭하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꾸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영속적인 신앙의 계승을 의미하며 진리와 정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이전 사람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새로운 제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일신교의 동일한 계보를 잇는 배경과 역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이슬람이 신앙의 길에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각 종교가 선지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공동 조상인 이브라힘은 이스마일과 이삭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이슬람에서 이브라힘과 이스마일로 이어지는 장자의 개념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개념적 차이에서 이견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견에 대한 이슬람적 견해는 하나님과 이브라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삭보다 먼저 태어난 이스마일이 당연히 장자로서 역할을 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1장 18절에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의 말씀은 이브라힘과 이스마일로 이어지는 아랍인들의 계보에서 이후에 나타날 선지자가 아랍민족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암시는 예수를 통해서도 확인되었으며 그가 자신 이후에 도래할 선지자가 있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이를 믿지 않고 비웃음과 조롱으로 대했던 것이다.(꾸란 61:06)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근거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이슬람 초기 메디나에서 이미 그 갈등이 표면화되어 불신과 적개심으로 팽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후 메디나에서 서로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여 공존할 수 있는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무함마드와 동맹을 맺어 안녕을 추구하는 듯했지만 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무함마드와 이슬람 공동체를 부정하고 불신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들의 인식저변엔 유대민족만이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고 그들만이 선지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우월감이 깔려 있다.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신의 계시를 전달하고 이를 가르쳐야 할 사명을 받은 무함마드에게 그들의 행위는 한계를 넘는 받아들이기 힘든 적대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반목에도 불구하고 메디나에서 이슬람 교세는 날로 커져갔고 그럴수록 유대인들의 입지는 약해져만 갔다. 이슬람 공동체가 그들에게 제시한 것은 단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유하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공존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이슬람 초기 메디나의 유대인들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며 종교와 민족, 인종을 초월하여 그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긴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박해의 아픔을 겪은 유대민족은 스스로 분쟁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이해와 포용으로 중동 평화를 위한 공존의 틀을 선도적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