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제재에 러 "이중잣대"… 진영 갈등 번진 벨라루스 여객기 사건

입력
2021.05.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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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역내 비행 금지… 바이든 "제재 동참"
러시아는 美전력 거론하며 벨라루스 두둔
전문가들 "벨라루스·러 공생 강화 가능성"

반(反)체제 인사 체포 목적으로 의심되는 옛 소련 국가 벨라루스의 여객기 강제 착륙 사건이 서방과 러시아 간 진영 갈등으로 번지는 분위기다. 사실상의 회원국 민항기 납치라 판단한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에 제재를 가하고 미국이 비난에 가세하자, 같은 의도로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킨 과거가 있는 미국이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며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두둔하고 나서면서다.

24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EU 27개 회원국은 이날 임시 정상회의를 열고 벨라루스 항공기의 역내 영공 비행 및 공항 이용 금지가 골자인 경제 제재안에 합의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유럽 민간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었다”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영국ㆍ프랑스 정부는 자국 항공사에 벨라루스 상공을 비행하지 말라고 주문했고, 네덜란드ㆍ독일ㆍ핀란드 항공사들이 줄줄이 벨라루스 영공 이용을 중단했다.

미국도 EU를 편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규탄 성명을 통해 “벨라루스의 강제 착륙과 (야권 인사) 라만 프라타세비치 체포는 국제 규범에 대한 직접적 모욕”이라며 “EU의 제재 결정을 환영하고 미국도 문책 조치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우군이다. 마리아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은 페이스북에서 2013년 7월 미 정부가 자국 기밀을 유출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잡으려 모스크바를 떠나 귀국하던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전용기를 오스트리아에 강제 착륙시켰던 전력을 거론하며 “미국이 이번 사건이 충격적이라 말하는 게 더 충격적”이라 비아냥댔다.

이번 사건으로 벨라루스가 서방과의 사이는 더 나빠지고 고립되겠지만 러시아와의 공생 관계는 더 강화되리라는 게 전문가들 예상이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러시아의 정치적ㆍ경제적 지원이 필요하고, 우크라이나와 갈등 중인 러시아 입장에서 벨라루스는 좋은 지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EU의 이스라엘 지지 중단을 요구하며 아일랜드 여객기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벨라루스 당국 해명이다. 하지만 하마스는 이날 자기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서방 언론이 전한 승객들 전언도 프라타세비치 체포를 위한 강제 착륙 정황을 뒷받침한다. 한 승객은 미 일간 뉴욕타임스에 “민스크 착륙이 안내되자 프라타세비치가 사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거의 공황에 빠졌다”고 전했다.

프라타세비치는 텔레그램에 반정부 채널 ‘넥스타’를 운영하는 유명 인사다. 넥스타는 구독자가 200만명에 이른다. 벨라루스 국영 매체는 이날 프라타세비치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고문당하고 있을까 봐 두렵다”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유럽 최후의 독재자’라 불리는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전날 전투기를 동원해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라이언에어 여객기를 자국 민스크 공항에 강제 착륙시켰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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