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계절의 여왕이면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은 장미다. 코로나19로 여전히 조심스런 나날이 이어지지만 계절은 어김이 없다. 이즈음 곡성 섬진강기차마을에도 장미가 만발했다. 20일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에선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봄날의 몽롱했던 기운이 씻기고, 푸르름을 더해가는 대지는 한결 산뜻하고 선명해졌다. 방울방울 물기를 머금은 장미도 더욱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곡성의 첫인상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완주순천고속도로 서남원IC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곡성 읍내로 접어들면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도로 양편에 줄지어 서 있다. 신록을 머금은 가로수 터널이 약 1km 이어진다. 원추형으로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은 바깥에서 봐도 운치 있다. 다만 걷기길이 없어 차량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점은 아쉽다.
KTX 곡성역에서 곡성읍과 오곡면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섬진강기차마을이다. 익산~여수 간 전라선 철도를 직선화하며 문을 닫은 옛 곡성역 일대를 관광지로 꾸민 종합놀이시설이다. 증기기관차와 레일바이크, 음악분수와 대관람차, 동물랜드와 요술랜드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두루 모아 놓았지만 이맘때 가장 주목 받는 시설은 단연 장미공원이다.
입장권(성인 5,000원)을 구입하면 옛 곡성역 건물을 통과해 공원으로 들어간다. 1930년 영업을 시작해 1999년까지 곡성의 관문 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주변 상가와 사무실도 오래전 역전 풍경으로 꾸며 아련한 기차여행의 추억을 되살린다.
장미공원이 가까워질수록 진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장미공원에는 1,004종, 3만7,000여 그루의 장미가 심어져 있다. 화단에는 키가 작은 장미부터 아치를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까지 다양하다. 꽃대를 모두 잘라내는 한여름을 제외하면 지금부터 가을까지 장미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공원의 자랑이다. 시든 꽃은 수시로 잘라내기 때문에 언제나 싱그러움을 유지한다.
매혹적인 색깔과 향기로 장미는 인간에게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면 장미가 생존전략으로 인간을 선택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작가 마이클 폴란은 ‘욕망하는 식물’에서 인간의 욕망을 매개로 전세계로 퍼진 네 가지 식물을 소개한다. 사과는 달콤함으로 인간을 유혹했고, 튤립은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인간을 번식의 매개체로 선택했다. 대마초는 도취의 갈망을 이용했고, 감자는 지배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그렇다면 장미는? 이 모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장미는 의미가 워낙 풍부하고 상징적인 형상이어서 이제 아무 의미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피오나 스태퍼드의 ‘덧없는 꽃의 삶’).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차마을은 상징적으로 ‘1004’ 종류의 장미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39개국의 장미 육성 정보를 교류하고 있는 ‘세계장미협회연맹’은 전세계에 3만 종이 넘는 장미가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 종자 개량 회사와 개발자는 물론이고, 지역과 유명인의 이름을 딴 것까지 장미의 색과 모양만큼이나 다양하다.
매혹적인 아름다움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는 장미는 분쟁의 상징이기도 하다.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쓰는 랭커스터 가문과 하얀 장미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요크 가문이 왕위 계승을 놓고 벌인 장미전쟁은 30년간 잉글랜드를 분열시켰고, 장미의 종주국 지위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 싸움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첩보 영화에는 ‘흑장미’ ‘백장미’로 불리는 미모의 스파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한국의 장미는 어떨까? 기차마을에 심은 많은 장미는 그 뿌리를 찔레에 두고 있다. 한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도록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게 진화한 찔레나무에 장미 가지를 접목했다. 수수한 모양새에 진한 고향의 향기를 지닌 찔레가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자태와 향기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장미의 근간이 된 찔레가 도리어 장미과 식물로 분류되고 있으니 후손이 조상을 능가한 격이다. 찔레뿐만 아니라 앵두 복사 살구 해당화 벚나무 딸기나무 조팝나무까지 수많은 꽃나무도 장미과로 분류된다. 이만하면 장미를 꽃의 제왕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장미는 보통 색과 향, 모양으로 평가한다. 장미공원의 팻말에는 각 품종에 대한 기본 정보가 담겨 있다. 팻말마다 장미꽃 이름 아래에 향기의 강도를 별점으로 표시해 놓았다. 꽃에 순위를 매긴다는 게 마뜩잖지만 세계장미협회연맹에서 수상한 품종은 특별히 큰 팻말로 표시해 놓았다.
장미의 유혹을 떨치고 인근 섬진강으로 나가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침실습지가 펼쳐진다. 장미공원이 인간의 손길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정원이라면, 침실습지는 섬진강의 물과 바람과 햇살이 빚은 자연의 정원이다. 섬진강과 곡성천, 오곡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천연 습지다. 상류에서 강물에 실려 온 모래가 퇴적된 곳에 버드나무를 위주로 억새와 갈대가 무성하다. 그 수풀에 수달, 고라니, 오소리를 비롯한 포유류와 다양한 새가 서식하고 있다. 각시붕어, 쉬리, 긴몰개 등 희귀 물고기의 보금자리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잘 보존돼 2016년 국가지정습지에 이름을 올렸다.
접근도 어렵지 않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곡천을 가로지르는 목재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섬진강과 습지가 비밀의 정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강변을 따라 걷기길이 조성돼 있고, 강 건너편 마을로 가는 철제 ‘뿅뿅다리’가 놓여 있다. 발 아래로 끊임없이 물소리가 재잘거리고, 살랑거리는 강바람이 더위를 식힌다. 이따금씩 수풀에서 날아오른 물새가 여울 위로 날갯짓한다. 자극적인 요소라곤 전혀 없는 자연의 쉼터다. 천천히 걷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니 강을 응시하는 게 전부지만, 그것만으로 긴장이 풀리고 평화가 깃든다. 자연으로부터 위로 받는다.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엔 물안개가 장관이고, 요즘 같은 여름이면 일몰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오곡면의 위상은 곡성에서도 독특하다. 마을에 3명의 인물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관광지도 아니고 남들이 특별히 알아주지도 않지만, 주민들에겐 마을의 자존심이다. 면 소재지 중심을 관통하는 국도변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안향을 기리는 ‘도동묘’가 있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순흥 안씨 후손들이 1660년 영주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영정을 모사해 모시고 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강사’라는 사당이 있다. 구한말 대표적 위정척사론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 그와 함께 기병한 조우식 조영선 정대현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대한제국 시기 대표적 초상화가인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을 소장하고 있다.
마을 뒤편 산자락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덕양사가 있다. 지방 유림들이 곡성 출신이자 평산 신씨 시조인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지만 유생을 가르치는 시설로 서당까지 갖춰 덕양서원으로도 불린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덕양서원’ 현판이 걸린 강학당이 있고 뒷마당에 동재와 서재 건물이 마주 보고 있다. 사당은 서원 가장 안쪽에 있다. 오곡면과 곡성 읍내가 나지막하게 펼쳐지는 전망 좋은 자리다.
옛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왕복 20km) 운행하는 증기기관차는 섬진강기차마을을 대표하는 체험 시설이다. 실제는 디젤기관차가 끌지만, 아련한 경적 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다. 섬진강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시간을 거스르는 추억 여행을 선사한다.
증기기관차 종착역인 가정역이 최근 ‘곡성 아트빌리지’로 변신했다. 기차를 활용한 갤러리와 숙소가 들어섰고, 펜션으로 활용하던 숙소의 일부는 체험 공방과 카페로 용도를 바꿨다. 섬진강이 코앞이어서 전망이 뛰어나 사진 찍기 좋도록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가정역에서 약 4km를 더 가면 압록리에 닿는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그 압록강과 이름이 같다. 압록(鴨綠)은 기러기 목둘레의 푸르스름한 비취색을 일컫는다. 보성강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두 물이 섞이면 이런 빛깔을 빚는다는 지명이다. 옛 압록초등학교 자리에 최근 ‘압록상상스쿨’이 문을 열었다. 중세의 작은 성처럼 지은 건물 주변으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소규모 출렁다리와 집라인, 물놀이장 등 모험용 체험 시설이 들어섰다. 특히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꼬마기차가 인기 있다. 보성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의 압록유원지는 요즘 캠핑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