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에 그림을 시작해 개인전까지 열었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삼육대학교 늦깎이 대학원생 홍수기(74ㆍ통합예술학과 2년)씨가 학교 박물관에서 26일까지 개인전 ‘포용하다’를 연다. 홍 씨가 틈틈이 그린 유화 40여점이 전시됐다.
홍 씨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부터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2019년 작고)를 병간호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평소 관심이 있던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창고에서 아들이 썼던 화구를 찾아 독학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진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개발했다. 그림에다 벨벳 천 같은 질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머리가 회전하는 붓도 개발했다.
그가 이런 화법에 천착하게 된 것은 오랜 사업 경험에서 비롯됐다. 1970년대 대구에서 섬유디자인 사업을 시작한 그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중동시장을 개척해 IMF 때도 호황을 누렸다. 독특한 천 디자인이 눈에 띄면 반드시 더 좋은 디자인을 개발해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길 가다 특이한 디자인의 벨벳 코트를 입고 있는 여성을 보고 뚫어지게 쳐다보며 쫓아가다 여자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탄탄한 중소기업이었지만 건강이 악화하고 자리보전하는 노모를 돌봐야 하면서 7년 전 사업을 정리했다. 하지만 벨벳 천 디자인 경험은 오롯이 남아 질감을 중시하는 그의 화풍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림을 그린 지 1년도 안돼 안견사랑미술대전(2016) 우수상을 수상하더니 이후 한국미술국제대전 특선, 강남미술대전 특선, 경기미술대전(이상 2017) 입선, 경기미술대전(2019) 입선, 목우회공모전(2020) 입선 등 25차례 수상했다.
하지만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그는 1996년 남양주 진접읍에 있던 사무실에서 퇴근하다 비가 내리는 데 거리로 나앉은 한 가족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빠와 몸이 아픈 엄마, 초등학생 자녀 둘이었다. 그 때부터 24평형 아파트에 8인의 동거가 시작됐다. 아내(66)는 싫은 소리는 안 했지만 고생은 미뤄 짐작할 만 했다. 이후 회사 근처에 컨테이너 주택을 만들어 이주시켰다. 아이들 부모가 작고한 뒤에도 대학까지 교육을 시키고 재산을 물려줘 독립시켰다.
비슷한 시기 동네에서 불량배 소리를 듣던 한 청년도 “사람이 돼라”며 취직시켜 일을 안 해도 꼬박꼬박 월급을 줬다. 미안했던지 그 청년은 일을 배워 자기 몫을 하더니 지금은 강원도에서 잘 살고 있다.
그는 사업을 그만둘 때까지 3개 고등학교에 매월 300만~400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내가 힘들더라도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면서 “나보다는 돌출행동을 하는 나를 이해해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는 그림에서 벗어나 만지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염색ㆍ날염업체를 상대하면서 느낀 질감이나 촉감을 시각과 연결하고 싶어서다. 전시회를 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라 진행하려 하자 코디네이터가 “너무 앞서가지 말라”며 말렸을 정도다.
지난해 요양원에서 자원봉사하는 아내와 각각 1,000만원씩을 삼육대학교에 기부한 홍 씨는 지금까지 팔린 2,200만원의 작품 값도 기부했다.
그는 77세에 시작해 103세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미국의 샤갈’이라는 별호를 얻은 해리 리버맨처럼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한국의 홍수기’가 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