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이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시행 유예기간이 종료되는 오는 9월 이후에도 가상화폐 거래소와 실명계좌 발급 등의 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미국과 중국 등 전 세계에서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규제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데다 최근 투자 열기도 크게 꺾이자, 수익성 확보를 위해 과거 관심을 뒀던 가상화폐 시장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은행과 실명계좌 발급 제휴를 맺지 못하는 가상화폐 거래소는 9월 이후 폐쇄될 수밖에 없어, 가상화폐 투자 시장 규모가 크게 줄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5대 시중은행 가운데 KB국민과 하나, 우리은행은 가상화폐 거래소와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가상화폐 거래소와의 계약은 자금세탁 등의 이슈가 있는 만큼 거래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거래소와의) 계약은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금융 관계자 역시 "지금은 가상화폐 거래소와 거래할 때가 아니라는 내부 의견이 모아졌다"고 말했다.
6개월간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9월부터 본격 시행되는 특금법 개정안에 따르면, 가상화폐 거래소가 영업을 위해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를 하려면 은행에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입출금 계정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 은행이 자체적으로 가상화폐 거래소의 위험도·안전성·사업모델 등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려 실명계좌 발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중은행들이 실명계좌를 내주지 않으면 가상화폐 투자시장은 그만큼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은행들은 당초 가상화폐 거래소와의 제휴에 긍정적이었다. 신규 고객들을 유치해 계좌 확보, 수수료 등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외에서 커지는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규제 목소리가 은행들의 태도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은행들은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전산 오류나 해킹, 자금세탁 등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터질 경우 그에 따른 리스크를 함께 떠안아야 한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들이 거래소와 제휴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며 "수익성 확대를 위한 새 시장 진출보다는 우선 리스크를 피하자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재 가상화폐 거래소 코빗, 빗썸과 각각 제휴를 맺고 있는 신한과 NH농협은 '제휴 중단' 등의 단정적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현재 업비트에 실명계좌를 제공하는 인터넷은행 케이뱅크도 거래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아직 은행들과 입출금 계좌 개설 제휴를 맺지 않은 중소 거래소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나마 제휴에 관심을 보이던 지방은행과 인터넷은행들도 최근 들어서는 당국 눈치에 난색을 표하면서 9월 이후 살아남는 거래소는 네다섯 곳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여러 은행들과 제휴를 논의하고 있지만, 워낙 은행 측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어 쉽진 않은 상황"이라며 "최근 코인 시장 활기가 떨어진 것도 분위기에 한몫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