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가 생각하는 이-팔 해법

입력
2021.05.23 15:07
이-팔 피의 악순환 그린 영화 '뮌헨'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세계가 분열되는 와중에 전 그저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영화 ‘핵소 고지’ 속 데스몬드의 대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열흘간 이어오던 무력 충돌을 중지했습니다. 지난 10일 시작된 유혈 분쟁으로 200명 넘게 숨졌다고 합니다.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운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폭격을 잇달아 가하면서 팔레스타인 쪽에서 사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번 다툼은 이스라엘 당국이 라마단 기간 이슬람교도인 팔레스타인 주민의 종교 활동을 제한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동예루살렘 지역 이스라엘 정착촌을 둘러싼 갈등 역시 이번 유혈 충돌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갈등은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쉬 꺼지지 않는 불씨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지속된 갈등은 누구를 우선 탓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다단한 싸움이 됐습니다. 이스라엘 내 정치적 계산과 팔레스타인 내 정파 싸움이 갈등 양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이란, 이집트 등 강대국과 주변 국가들의 잇속이 포개지면서 해결은 더욱 멀어 보입니다.

“대체 끝은 어디죠?” 할리우드 영화 ‘뮌헨’(2005)의 한 등장인물이 내뱉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피의 보복을 반복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담긴 표현입니다. 1948년 이후 시계바늘을 언제로 맞추든 시대를 반영하는 한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뮌헨’은 1972년 뮌헨올림픽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20세기 후반 할리우드 최고 흥행술사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에릭 바나와 대니얼 크레이그, 제프리 러시 등이 출연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이면을 세밀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정통 유대주의자 집안에서 자란 스필버그 감독의 눈으로 살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라 더욱 흥미롭습니다. 왓챠네이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시다면 박찬욱 감독의 영국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2018ㆍ왓챠)도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https://watcha.com/contents/share/mJO1kx5

①갈등 불씨 키운 뮌헨 올림픽 참사


운동복 차림의 수상한 남자 8명이 어느 건물 벽을 뛰어넘으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건물로 잠입한 일행은 운동가방에서 총을 꺼내 들고 “목표는 승리해서 귀향하는 것”이라는 구호를 낮게 외칩니다. 이들은 건물에 머물던 사람들을 총기로 위협하고 억류합니다. 1972년 9월 5일 새벽 뮌헨 올림픽 선수촌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검은9월단 소속 테러범들은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인 234명 석방 등을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TV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소식에 이스라엘 국민은 분노하고, 팔레스타인인은 환호합니다. 인질극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당시 서독 정부는 다음날 테러범들에게 항공기를 제공하고 퇴로를 열어주기로 했으나 속내는 달랐습니다. 테러범들이 방심한 사이 공항에서 진압작전을 펼치려 했습니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테러범 5명이 사살되고, 이스라엘 선수단 인질 9명이 몰살 당했습니다.

뮌헨 올림픽 참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무력충돌이 본격화되는 분기점이었습니다. 숙소에서 피살 당한 2명을 포함해 11명을 테러로 잃은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에 나섰습니다. 시리아와 레바논에 위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기지에 폭격을 가해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분은 이 정도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비밀 팀을 만들어 테러와 관련된 팔레스타인 주요 인사 11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보복 폭격으로 충분하지 않냐는 한 각료의 주장에 영화 속 당시 골다 메이어(1898~1978) 이스라엘 총리는 말합니다. “함께 살기 싫다고 했으니 ‘우리도 너희와 세상에 공존할 수 없다’고 경고해야지… 당분간 평화는 잊고 우리가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②끔찍한 복수의 순환고리

모사드는 비밀작전 수행을 위해 아브너(에릭 바나)를 불러들입니다. 총리 경호원까지 했던 아브너는 그의 아내에 따르면 “조국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암살에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자 아브너를 모사드에서 퇴직 처리합니다. 공작자금은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지급합니다. 아브너는 과거를 잘 알 수 없는 팀원 4명과 함께 암살 작전에 나섭니다.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사이프러스, 그리스 아테네, 레바논 베이루트 등에서 작전이 펼쳐집니다. 아브너는 프랑스 거물 정보원 루이(마티유 아말릭)에게 거액을 주고 제거해야 할 인물들의 거처를 알아냅니다. 전화기나 TV, 침대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직접 총격을 가해 명단에 오른 인물들을 하나씩 암살합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어지지만, 팔레스타인의 공세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거세집니다. 11개국 이스라엘대사관으로 폭탄 소포가 배달됩니다. 아테네공항 등에서 이스라엘인을 겨냥한 테러가 이어집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지도부는 과격한 인물로 대체됩니다. 비밀 암살작전이 부른 역효과입니다. 아브너 일행에게 위협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신분이 노출되면서 팔레스타인 조직이 이들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처음에는 의기 충만했으나, 작전이 지속되면서 회의감을 갖는 팀원이 생겨납니다. 팀원끼리 갈등하기도 합니다. 다혈질인 스티브(대니얼 크레이그)와 생각이 많은 칼(시아란 힌즈)이 특히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스티브는 “놈들처럼 행동을 안 하면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칼은 “늘 놈들처럼 행동해왔어(그런데 평화는 오지 않고 있어)”라고 맞받아칩니다. 둘의 다툼은 팔레스타인의 무력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고민을 보여줍니다.

“생각은 하지마”라며 임무수행에만 몰두하던 아브너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데다가 가족의 안위까지 걱정됩니다. 암살작전에 정치적 의도가 깃들어 있다는 의혹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보복의 악순환이 평화를 불러 올 수 없다는 점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③분쟁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가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외부 세력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정보원 루이의 가족을 통해서입니다. 루이의 가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돈을 벌어들입니다. 충돌이 격화될수록 루이 가족의 통장잔고는 급격히 늘어납니다. 루이는 피 묻은 돈으로 고급 양복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의 대가족은 무장경호원이 상주하고 있는 저택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고 싶으시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루이의 아버지 ‘파파’는 2차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브너에게 악어의 눈물 같은 동정을 표시합니다. “세상은 자네 같은 유대인에게 너무 가혹했어. 그런 취급에 보복은 정당한 거지.” 그는 아브너에게 연대감을 드러내면서도 뒤로는 팔레스타인 조직과 손을 잡습니다. 돈이라면 이스라엘이든 팔레스타인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루이는 아브너에게 서늘한 경고를 합니다. “내가 왜 넌 안 죽이려고 하냐고? 누구보다 더 많은 돈을 내니까.” 루이는 요리가 취미인 가정적인 가장 아브너에게 이런 말도 합니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집은 꾸밀 가치가 있잖아?” 안보를 위해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 이스라엘의 처지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2008년 1월 1일 이후 양측의 충돌로 팔레스타인인 5,587명이 숨지고, 이스라엘인 249명이 사망했습니다. “손톱이 자라면 깎아야 한다”(영화 ‘뮌헨’ 속 모사드 간부 에프라임의 대사)는 생각이 부른, 보복의 결과들입니다. 누구든 악순환을 중단하겠다는 용기를 먼저 내야만 멈출 수 있는 비극입니다.

영화 속 비밀 암살단원의 일원인 로버트(마티유 카소비츠)는 잔인한 보복을 거듭하다 번민에 빠집니다. 그는 동료에 대한 복수에 나서기 전에 말합니다. “우린 유대인이야. 적이 악하다고 똑같이 악인이 될 수는 없어…. 증오를 수천 년 참는다고 품위 있어지는 건 아니지만 정의를 따라야지. 그건 아름다운 거니까. 그게 유대인이잖아. 난 그렇게 알고 배웠어.” 스필버그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 보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평화의 손을 내밀어라.’ 영화 ‘뮌헨’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https://www.hankookilbo.com/NewsLetter/NewsJam



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