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수단, 목적 정당화할 수 없다

입력
2021.05.2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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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의 의혹사건이 마키아벨리 소환
탈원전, 환경부 블랙리스트도 유사해 
절차적 민주주의 훼손, 레임덕 앞당겨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오래된 정치적 논쟁이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그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후세 정치학자들이 그의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했다고 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금 의혹 사건의 공소장이 공개되면서 느닷없이 마키아벨리가 소환됐다. ‘실체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김 전 차관을 체포해서 불가피하게 ‘절차적 정의'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이다. 수단은 절차적 정의, 목적은 실체적 정의겠다. 권력의 세계에서 실체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는 자주 충돌한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관과 전직 법무부 장관 2명 등 현 정권의 고위직이 대거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검사 1호’ 사건으로 이규원 검사를 수사 대상으로 정했다. 이 검사는 김 전 차관 사건과 관련, '윤중천 보고서' 허위 작성 및 유출 혐의를 받고 있다. 그 바람에 공수처가 오히려 여권인 더불어민주당의 공격에 시달린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에 대한 수사에 이어 이 검사에 이르기까지 공수처 수사가 현 정권을 겨냥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 상황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1월 2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왜 이 사건을 갖고 절차적 정의의 표본으로 삼는가에 대해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라고 밝힌 바 있다. 별장 성접대 등 김 전 차관의 혐의를 밝혀 실체적 정의를 파헤쳐야지, 청와대 등 정부 여권 인사들이 개입한 불법 출금 의혹 등의 절차적 정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정부 인사들의 이 같은 인식은 주요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주 엿보인다. 탈원전 정책에서도 절차적 정의가 무시됐다. 그래서 청와대 비서관, 산업부 장관, 회계법인 등이 개입됐다는 것이 법원 판결을 통해 확인됐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도 유사한 궤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정권 장관이 구속되는 등 절차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의 전도 현상이 자주 있었다는 얘기다.

절차적 민주주의 잦은 훼손은 레임덕을 앞당기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레임덕보다 더한 것도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레임덕을 넘어 브로큰덕(broken duck)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5%를 기록하는 등 사실상 데드덕(dead duck)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레임덕을 부추기는 것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청와대가 재나 뿌리지 말라”는 게 여당 일부 인사들의 입장이다.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송영길 대표도 청와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송영길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 회동에서 "임기 마지막이 되면 정부와 여당 간에 좀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또 당도 선거를 앞둔 그런 경쟁 때문에 분열된 모습을 보였던 것이 과거 정당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차분하게 얘기했지만 레임덕과 당청 분열을 매우 심각하게 두려워하는 분위기다. 5년 단임제에서 레임덕은 대통령의 숙명이다. 서슬 퍼렇던 집권 초기의 결기는 사라졌다. 절차적 정의를 무시했던 행태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정권 핵심 세력들이 법정에 서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의 기시감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언급을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목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조재우 에디터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