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출가’ 하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몇 년 전 미얀마 순례 때 한 사원에서 만난 10대 후반 여성 수행자의 기쁨에 찬 밝은 표정. 그것은 즐거움이 충만한 행복의 기운, 그 자체였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수행자란 밝기보다는 고뇌에 찬, 대학으로 말하면 철학과 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기곤 한다. 그런데 그녀는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강력한 신록과도 같았다.
궁금해하던 내가 그녀에게 들은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자신은 불교를 좋아해서 결혼하기 전에 꼭 한 번 출가하기를 원했단다. 그것이 이루어져 이제 출가 기간을 채우고, 1주일 후에는 결혼하게 된단다. 그래서 모든 소망이 이루어졌으니 즐겁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 출가가 이렇게도 활용될 수 있구나!
동아시아의 출가는 고뇌에 찬 결단 같은 무거운 그림자를 안고 있다. 그런데 남방불교는 우리와 달리 출가가 보다 유연하게 자리매김한다.
붓다 당시 출가는 오늘날 명상센터를 가는 것과 유사했다. 그래서 친구 따라 출가하는 경우도 여럿 존재한다. 출가하더라도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도시 생활에 찌든 현대인이 콘크리트를 탈출해 자연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막상 자연에서의 삶이 시작되면, 계산에 없던 불편함이 엄습하며 다양한 피로감에 직면하게 된다. 이럴 때 그 사람은 다시금 도시로 출가한다. 이렇게 왕복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의 출가는 너무 무겁다. 붓다 당시 출가는 가볍고 유연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출가와 속퇴, 혹은 출출가를 반복하는 경우가 존재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행동을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출가는 자신의 행복을 찾는 자유의 여정이며, 그에 따른 선택은 오직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 도시의 여성들이 붓다를 비난한 기록이 있다. 그들은 ‘어제는 누구의 남편을 데려가고, 오늘은 또 누구의 아들을 데려가려 하는가!’라고 한탄한다. 앞다툰 남성들의 출가로 인해, 돌연 홀로 남게 된 여인들의 회한 어린 비난이다.
그러나 붓다는 행복하라고 말할 뿐, 출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행복과 만족을 위해 스스로 모여들었을 뿐이다. 마치 요즘 아이들이 아이돌이 되기 위해 연예기획사를 찾아 연습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습생은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 또 그들은 사회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정으로 매진하고 있을 뿐이다. 출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출가는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는 고요함과 행복에 대한 추구라고 하겠다.
일본의 불교학자인 사사키 시즈카는 출가를 ‘섬과 같다’고 설명한다. 제주도는 육지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분절 공간일 뿐이다. 즉 연결되어 있지만 걸리지 않고, 분리되어 있지만 단절되지 않은 행복의 세계, 이것이 바로 출가다.
대승불교에서는 몸의 출가 외에도 마음의 출가를 강조한다. 마음의 출가란, 도시의 잿빛 일상 속에서도 내면은 각박함을 벗어나 평안한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에 주목받는 명상 문화는 마음의 출가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탈출의 벗어버리는 자유가 아닌, 이 자리에서 놓아버리는 관조의 미학이다. 이런 점에서 출가란, 머나먼 지평선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푸르른 오아시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