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대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보물이다

입력
202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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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자존감 낮은 사람이 이른바 미국 명문대에서 공부하고 또 다른 명문대에서 교수 노릇을 하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리다 보니 지천명이 가까운 지금도 이른바 ‘임포스터 신드롬’ 혹은 ‘사기꾼 증후군'에 시달린다. 학생들을 십수 년 가르치면서 증세가 좀 나아졌나 싶다가도 대학원생이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할 때면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하는 의심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평생 훌륭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복을 누려 온 나에게 누군가의 지도교수가 된다는 것은 아직도 부족한 덕과 재주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지도학생을 제자가 아니라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동료로 생각하고 대하려 노력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서 쓰는 꼼수인 셈이다.

지난주 동료처럼, 친구처럼 지내오던 지도학생이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혁신에 대한 훌륭한 논문을 쓰고, 팬데믹으로 대부분 대학들이 신규채용을 동결한 험한 상황에서 좋은 학교에 교수자리를 잡아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자랑스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슬란드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학문에 뜻을 두고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인데, 인구 4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대서양 화산섬에서 온 학생과 북태평양의 조그만 반도국에서 온 교수가 미국 중서부 한 대학에서 만나 사제의 연을 맺었으니 참 신기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 친구가 주도해 만든 스터디그룹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도 하고 논문도 같이 쓰고 했는데, 에콰도르, 스코틀랜드, 보스턴, 네브래스카에서 온 대학원생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그룹이었다. 재작년에는 영국에서 열린 학회에 같이 논문을 발표하러 갔다가 며칠 시간을 내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를 사나운 비를 맞으며 같이 걸었는데,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끝없이 사회학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던 그 시간은 오랫동안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가 천하의 젊은 인재를 만나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 즐거움은 젊은 인재에게서 선생이 배우는 데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학생을 가르치면서 진짜 큰 배움을 얻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오히려 선생이라는 건 교수들의 영업 비밀이다.

그런데 이 귀한 인연이 매디슨이라는 미국 중서부의 춘천보다 조금 작은 호반의 도시에서 맺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싸구려 모텔과 패스트푸드 체인 사이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공립대학들이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보물이라고 했다. 유럽의 명문대학에 그 뿌리를 두는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달리 링컨 대통령 때 정부에서 기부받은 땅에 교육, 연구, 봉사라는 사명을 가지고 만들어진 공립대학들이 진정 미국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주장이다. 레이건 행정부 이후 공공성에 대한 지속적 전방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수 공립대학들은 세계에서 몰려오는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하고 최첨단 연구성과를 쏟아내는 소중한 공공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지역주민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으로 자녀들에게 세계적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백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과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이제 정말 동료이자 친구가 되어 떠나는 제자를 축하하며 그 인연을 맺어준 공립대학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